“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아가씨를 만나게 됐어요.”

여러 이미지가 혼재된 동안의 김태리에게 요즘 유행인 ‘인생00’을 적용한다면 ‘아가씨’(6월2일 개봉)는 ‘인생영화’다. 세계적인 감독 박찬욱의 신작 여주인공으로 캐스팅됐을 뿐만 아니라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게 해준 작품이니. 강렬한 데뷔를 한 여배우는 올해 스물일곱, 어린 나이가 아니다. 연극무대에서 연기력을 벼려온 신인 아닌 신인을 노크했다.

 

■ 직진하는 당찬 하녀 숙희

돈과 마음을 뺏기 위해 서로 속고 속이는 자들의 이야기를 담아낸 ‘아가씨’에서 두 주역은 어릴 적 부모를 잃고 후견인 이모부의 엄격한 통제 아래 살아가는 귀족 히데코(김민희)와 그녀의 새로운 하녀로 들어간 소매치기 고아소녀 숙희다.

“숙희라는 인물과 이야기에 가장 꽂혔어요. 남성중심 영화들에서 여성 캐릭터는 괜히 나왔다가 소비되고, 구멍만 메운 채 사라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아가씨’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자기 이야기를 풀어가는 가운데 서로 어우러지는 점이 좋았어요.”

3부로 구성된 영화에서 1부의 화자를 맡은 숙희 역 김태리는 아가씨의 상속 재산을 노리는 백작(하정우)과 거래 후 하녀로 위장 진입했으나 어떤 상황에도 멈칫거리지 않은채 아가씨에 대한 연민과 사랑, 질투의 감정을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며 직진한다.

“숙희의 감정이나 그 아이가 살아온 드라마틱한 삶은 촬영하면서 보완해나갔어요. 숙희의 대사가 입에 붙고 감정이 편해졌을 때 나아졌죠. 감정이 일직선인 건 편했어요. 반면 변화무쌍해야 했던 히데코가 힘들었을 거예요. 숙희 캐릭터보다 대사, 소품, 음악에 대해 토론하며 이뤄간 감독님과의 소통이 원활했고요. 막히면 속 시원히 뚫어주시곤 하셨죠.”

■ ‘친절한 금자씨’ ‘스토커’와 맞닿은 ‘아가씨’

평소 ‘완벽에 가까운 이야기’를 만든다고 여긴 감독이었다. ‘아가씨’ 시나리오를 보고나서도 같은 생각이 들었다. 1500대1의 경쟁을 뚫고 캐스팅된 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을 다시 탐독했다.

“복수 코드가 강하고 스토리가 재미난 ‘친절한 금자씨’를 가장 좋아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장면이 튀어나오는 점이나 내레이션 기법도 좋았고요. 캐스팅 이후 봤을 때는 할리우드 진출작 ‘스토커’가 인상적이었죠. 감독님 특유의 유머 코드는 적지만, 2시간 안에 구멍 없이 짜임새 있는 스토리를 만들어내신 게 놀라웠어요. 살인마 성향 아이의 자기 발견적 성장영화에 그치지 않고, 갇혀 있던 세계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선택의 발걸음 내딛는 점에서 우리 영화랑 닿아 있단 느낌이 들었어요.”

 

■ 여성 향한 편견과 차별 정조준

‘아가씨’의 원작은 여성들의 연대와 독립을 다룬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다. 각색 과정에서 시공간적 배경은 권위주의 가부장제, 폭력적 일본 군국주의라는 이중 억압이 존재하던 1930년대 일제강점기로 설정됐다.

“원작을 보신 분들이 가장 흥미를 느낄 부분은 시대를 일제강점기 한국으로 옮겨온 게 아닐까 싶어요.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다룬 영화를 원하는 분위기인 것 같고, 이제 이런 영화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같아요. 여성 관객들이 ‘아가씨’를 많이 좋아해 주시는 이유겠죠. 내면 깊은 곳에서 계속 바라왔던 욕망의 발현인 듯해요. 무수히 많은 리뷰 중 ‘여성해방’이란 네 글자가 가장 기억에 남고요.”

■ 일본어 대사 & 동성애 베드신

‘아가씨’는 방대한 대사양에 말장난, 풍자와 유머가 흥건하다. 그 가운데 절반 이상이 일본어다. 칸에서 영화를 본 일본 취재진은 배우들의 일본어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칭찬하기까지 했다.

“지난해 2월, 기초부터 시작해 굉장히 많은 시간을 투여했어요. 촬영 중에도 일본 배우가 현장에 상주하며 체크해줬죠. 여성스럽게 굴려주고, 높낮이를 주는 점이 이상하면서도 매력적이었어요. 언어에 대한 불안함이 없는 상태에서 감정에 집중할 수 있었죠. 나중엔 나긋나긋하게, 단호하게, 아기 다루듯 말하는 장면에 적합한 톤을 구사하게 됐고요. 지금은 영어를 열공 중이에요. 기회가 된다면 다른 나라 언어들을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문화차이를 확인하는 게 흥미로워요.”

상대역 김민희와의 과감한 베드신도 화제가 되는 중이다. 그간 퀴어코드 한국영화에서 남성간 베드신은 몇차례 있어왔으나 여성 베드신은 드문 케이스인데다 강도가 꽤 높다.

“동성애 소재 영화들은 관능적인 게 많았어요. 그런 영화들을 보며 ‘베드신이 필요한가’란 의문을 설득 당했던 것 같아요. 많이 숙고하게 됐죠. ‘아가씨’에서는 또 둘이서 너무 귀여운 말들을 나누니까 그 장면을 재밌게 촬영했어요. 유머를 너무 사랑하거든요. 완성본을 보니까 감독님의 의도를 더 잘 이해하게 됐고요.”

■ 연극과 동거해온 6년

경희대 신문방송학과 재학 시절 전공에 대한 흥미가 제로였던 김태리는 운명처럼 연극동아리에 몸을 실었다. 스태프와 배우로 ‘분장실’, 작가 닐 사이먼의 번역극들에 참여했다. 졸업 후 극단 이루에 입단해 창작극 ‘사랑을 묻다’ ‘팬지’, 영국작가 리 홀의 번안극 ‘넙죽이’ 등에 출연했다. 지금도 이루 소속 배우다.

“흥미 본위로 산 것도 있었고 연극작업이 너무 즐거웠어요. 배우라는 직업을 선택하게 된 계기가 됐고요. 무대에 서면서 이 직업을 허투루 생각하지 않고, 존경하게 된 거 같아요. 칸영화제 참석 이후 요즘 드는 생각은 ‘재미 위주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어야하지 않나’예요. 영화의 영향력이 굉장히 크기에 단순히 나만의 재미를 위해 연기한다면 언젠가 큰 위기를 맞을 거 같아요. 일단은 닥치는 대로 열심히 해보려고요.”

말간 눈동자로 덧붙였다. “다른 욕심이 있는 게 아니라 좋은 배우가 되고 싶은 거니까”.

 

사진 이완기(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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