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지역 전문 PD 김영미 씨가 아프가니스탄을 비롯한 중동의 전장을 다니면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거기 사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선량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구약의 가르침에 따라 나그네를 환대하는 사람들이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사진=김재성 주필

총을 든 병사들은 적개심에 불타 있으면서도 고향 어머니와 나이가 같다며 김영미 씨를 ‘엄마’라고 부르는 착한 소년이었고 제 키보다 더 긴 총을 멘 15살 탈레반 병사는 미군의 오인사격으로 희생된 형의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형제 의리에 목숨을 건 순진한 소년이었다.     

‘빗속에 서 있는 기차’를 보고 슬픔을 느끼는 것은 시인(파블로 네루다)만의 감성이 아닐 것이다. 누구나 그런 시심이 있기에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고 하는 것 아닌가. 이렇듯 아름다운 시심의 소유자들이 왜 집단의 이름으로 전쟁을 벌이고 포악한 살상자가 되는가? 
 
미국의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모든 집단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생존 본능에 뿌리를 내린 권력의지가 있으며 그 의지가 팽창 욕구로 이어진다’고 봤다. 따라서 개인이건 집단이건 강자가 되면 그 지위를 놓치지 않으려는 강박관념에서 권력의 확장을 시도한다는 것이다. 

권력자가 자신의 무한 권력욕을 집단의 이익으로 치환할 때 전쟁의 위험에 빠진다. 프랑스혁명의 이념인 자유 평등 박애의 희망이 그렇게 쉽게 제국주의적 악몽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나폴레옹의 무한 권력욕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니버’의 관점이다. 이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이기적 탐욕을 성장의 동력으로 삼는 시장의 문제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에 의해 저절로 해결된다는 아담 스미스의 말은 허사(虛辭)다. 자본주의 모순이 구조화될 무렵인 1930년대에 니버가 이런 글을 썼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자료=책숲 제공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 대미 20년 전쟁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아프가니스탄이 미국 이전에도 영국, 소련으로부터 100년 동안 시달렸듯이 북부의 막대한 유전이 있고 강대국의 탐욕이 있는 한 영구 평화를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강대국이 약소국을 병탄할 때는 항상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난다. 먼저 외세에 빌붙는 세력이 생긴다. 2차 대전 후 중동의 모든 분쟁의 배후에 미국이 있었듯이 강대국은 내부 반대세력을 지원한다. 이들이 내전으로 지쳐있을 무렵, 적당한 핑계를 만들어 들어간다. 

그런 다음에 그 나라의 문화 풍속을 혐오의 대상으로 비하한다. 그리해 그 나라 지배를 문명의 시혜로 둔갑시킨다. 탈레반은 이슬람 신학생들이다. 탄압을 받았을 때 굴복하지 않으면 더 강해지는 것이 종교의 속성인데 탈레반은 미국의 억압에 맞서기 위해 신앙으로 뭉쳤다. 그리고 저항하다 보니 더 근본주의자들로 변모했다. 

탈레반이 그들만의 관습을 강화하는 것은 그 자체가 외부 억압에 대한 저항이다. 이 저항으로 자신의 정체성이 더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 ‘과격세력’ ‘여성 학대’ 등 자신들을 향한 외부의 비판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고 한 장자의 말은 필연적으로 그래야 할 까닭이 있다는 뜻이다. 이슬람 문화는 이슬람 금욕주의의 한 단면이며 이는 신앙의 생명이다. 이를 매도하는 것은 종교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한 무지의 소치다. 우리가 언제부터인가 남편 따라 죽지 않았다는 뜻의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말을 쓰지 않듯이 종교의 계율에 뿌리를 둔 관습도 인류 보편적 가치와 맞지 않으면 교류를 통해 점차 순화되기 마련이다. 이를 미사일을 앞세워 교화시키려는 태도는 문명의 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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