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가 남원 운봉 일대의 가야 고분군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면서 일본 서기에 등장하는 ‘기문국’과 ‘기문가야’로 기록하려는 데 대한 남원신문(발행인 노문주)을 주축으로 현지 주민들과 재야 사학자들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사진=김재성 주필

이 사건을 접하면서 소름이 끼치는 것은 이것이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는 점이다. 무슨 말인가? 1945년 8월, 마지막 조선 총독 아베 노부유끼(阿部信行)가 한반도를 떠나면서 남긴 고별사가 있다. “우리는 비록 전쟁에 패했지만, 조선이 승리한 것은 아니다. 

장담하건대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옛 영광을 되찾으려면 100년이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인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놨다. 조선인들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그리고 나 `아베 노부유키`는 다시 돌아온다.”

아베의 호언(豪言)은 마치 오늘의 사태를 예견한 듯하지 않은가? 광복 76년, 아직도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학자, 일본군 성욕 해소를 위해 강제 동원된 위안부를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쓸개 빠진 교수, 임나 일본부를 사실로 믿는 정신 나간 학자가 있으니 아베의 장담(壯談)은 빈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아베가 말한 식민교육이란 바로 식민사관을 말한다. 그 핵심 줄거리가 1946년까지 8세기경에 쓴 일본 연대기로 기원전 660년에 태양의 여신이 보낸 손자와 지구의 신과 결혼해서 태어난 진무천황 신화를 바탕으로 4~6세기에 일본이 신라와 백제를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문제가 된 기문국과 기문가야도 그 연원인 임나일본부 설도 일본 연대기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임나 일본부 설의 뿌리인 일본 연대기는 일본 왕실의 신격화를 위한 신화일 뿐 일본 학계에서도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다. 인류학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국내에서 베스트 셀러가 된 ‘총, 균, 쇠’ 말미에 ‘일본인을 어디서 왔는가’라는 추가 논문을 실었다. 

여기서 그는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기원전 660년 진무 천황과 실제 일본 왕실이 등장하는 천왕 사이에 시간적 갭이 커 13명의 가공의 왕을 만들어 냈으며, 2차대전이 끝나기 전 일왕 히로히토는 마침내 일본인에게 본인이 신의 후손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표했다”고 지적했다.

한국과 일본은 지정학적 특성상 왕래가 잦았다. 이는 환경이 열악한 일본이 한발 앞선 한반도에 와서 노략질을 일삼았던 것인데 일본은 역으로 일본은 이를 한국을 점령한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대륙문물이 한반도를 경유해 섬나라 일본에 건너간 정황은 여러 고고학적 증거들이 말하고 있으며 일본의 왕실이 사실은 백제인의 후손임을 추론할 수 있는 자료, 그리고 일본이 고구려나 백제의 지배를 받았다는 근거도 많다.  

출처=네이버 지식백과

‘총, 균, 쇠’에 소개된 백제 21대 왕인 개로왕(蓋鹵王) 기사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도쿄 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5세기 무렵의 은으로 장식된 철제 검에 새겨져 있는 판독이 난해한 글자들이 있는데 일본학자들은 이를 일본 서기에 기록된 미즈하와키 왕과 그의 신하 한국인 초안이라고 해석했다. 그런데 1966년 북한의 역사학자 김석형이 마모된 글자는 백제의 개로왕이고 이름이 기록된 신하는 한국의 봉신(封臣)이란 해석을 내놓아 일본 역사학계를 초토화 시켜버렸다. 이 사실을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에 그대로 언급했으나 일본에서는 아무도 이에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문제는 청산하지 못한 일제 잔재다. 일제하에서 식민사관을 전수한 이병도가 사학의 비조가 되고 그 밑에서 배우고 학위를 받아 교수가 된 학자들이 또 제자들을 배출해 오늘의 주류사학을 형성했으니 말이다. 

더 큰 병통은 아직도 일본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다는 식민지 근성을 버리지 못하는 이른바 보수, 지식인들이다. 조상의 성(姓) 바꾸는 것과 같은 심각한 사건인데도 무조건 “일본과 싸워서 좋을 것이 없다”며 오불관의 태도를 취하는 지도층, 이들이야말로 내부의 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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