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조성진 선우예권 손열음 등 유명 콩쿠르를 제패하며 세계무대에서 명성을 떨치는 젊은 연주자들이 즐비하지만 1960~70년대 클래식계는 동양인들에겐 ‘넘사벽’이었다. 변방의 나라 ‘코리아’를 서양에 알린 원조 스타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다.
67년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리벤트리트 콩쿠르에서 핀커스 주커만과 공동 우승을 시작으로 ‘정열과 치열’의 연주로 20세기를 평정했던 연주자, 21세기에는 ‘리빙 레전드’가 된 정경화가 칠순을 맞아 33번째 정규음반 ‘아름다운 저녁’(Bon Soir)과 함께 돌아왔다. 워너클래식을 통해 나온 이 앨범은 지난 23일 전 세계 동시 발매됐다.
“음반을 녹음할 때마다 새롭습니다. 하나도 쉬어지는 게 없이 점점 더 힘들어져요. 그래서 제가 ‘레전드’란 호칭을 싫어해요. 레전드는 대가답게 힘들이지 않고 뚝 나와야 하잖아요.(웃음) 온 기력과 정성을 다한 '아름다운 저녁'을 녹음하면서 정말 이렇게 힘들어서는 더 이상 못하겠다 싶기도 했습니다.”
27일 서울 광화문 문호아트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여전한 에너지와 폭풍수다(?)로 말문을 닫을 줄 몰랐다. 마침 전날은 정경화의 70세 생일이었다. 기분은 더욱 좋아 보였다.
3신보에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곡가 포레, 프랑크, 드뷔시의 작품을 담았다. 그가 프랑스 작곡가들의 곡만 담긴 음반을 발매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다. 첫 음반은 1978년에 로열 필하모닉과 함께 쇼송, 생상, 라벨의 작품을 담았고, 두번째 음반은 1980년 드뷔시와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한 바 있다.
특히 포레 바이올린 소나타는 첫 녹음이고,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와 보너스 트랙인 엘가 ‘사랑의 인사’(1987년 소품집 ‘콘 아모레’ 수록곡)는 각각 38년, 31년 만의 두 번째 녹음이다. 올해로 타계 100주년을 맞은 드뷔시의 ‘아름다운 저녁’은 세 번째 녹음이라 이채롭다.
“20대에 녹음했던 프랑크 소나타는 악몽이었어요. 당시 20대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연주가 상상 이상으로 대단해서 주눅이 들고 활까지 떨릴 정도였어요. 리허설도 하지 못한 채 꾸역꾸역 녹음했던 거라 3년 동안 릴리스도 안했었죠. 그런데 이번에 함께한 피아니스트 케빈 케너는 7년 동안 호흡을 맞춰 왔기에 그때와는 완전히 틀려요. 한 목소리를 낸 거죠. ‘사랑의 인사’는 그 무렵 태어난 첫 아들을 위해 녹음한 곡이에요. 예전에 녹음했을 때는 정열을 담아 연주했다면 이번에는 안정된 마음에서 연주해 과거보다 더 심플하게 들릴 거예요.”
그런 맏아들은 장가를 갔으나 아직 그에게 손주를 안겨주지 않았다. 손녀가 태어났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 포레의 '자장가'를 이번 음반에 넣었다.
"포레의 자장가는 미국에서 바이올린을 배우던 1963~4년에 처음 연주했어요. 어머니가 아이에게 자장가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마음이 잘 담겨진 곡이죠. 녹음 당시 케빈 케너가 아이를 키우고 있어서 자장가를 잘 연주할 수 있었어요."
이번 녹음에 사용한 바이올린은 현악기 제작 가문인 스트라디바리 가문에서 1702년에 제작한 '막스밀리안 요제프'이다. 정경화가 독일 바이에른 왕국의 초대 국왕을 이름을 딴 이 악기로 녹음을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경화는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잊지 못할 순간으로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게 된 1980년대와 손가락 부상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복귀한 2000년대 중후반을 꼽았다.
“70년 런던에서 유럽 데뷔무대를 가진 이후 녹음과 연주만을 하며 80년도까지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전에는 나에게만 집중했는데 30대에 접어들어 가정을 이루고 아들 둘을 낳으면서 내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죠. 원래 성격이 굉장히 날카로웠지만 아이를 낳은 뒤부터는 성격도 많이 바뀌었어요. 2005년 손가락 부상을 당했을 때 은퇴하고 줄리아드에서 교수만 하고 있을 때 어머니의 긍정적인 가르침이 큰 도움이 됐어요. ‘제일 힘든 일이 있을 때 앞을 제대로 바라 볼 수 있다. 힘들 때 공부를 해라, 그래야 성장을 꾀할 수 있다’란. 그래서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애들 가르치고, 머릿속에서 여러 가지 방향을 모색했던 거죠.”
65년 동안 바이올리니스트라는 한 길을 걸을 수 있었던 비결을 묻자 돌아온 대답은 “우연하게 그렇게 됐다”는 한 마디와 호쾌한 웃음이었다.
“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셨던 어머니께서 ‘인생이 한 폭의 그림이라면 계속 그려나가다 나중에 마음에 안 든다고 마구 칠해버리면 얼마나 큰 낭비냐”라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깊은 인상을 남긴 말이었죠. 인생의 황금기라고 할 40대가 지나서도 꾸준히 위로 올라갈 수 있다면 바라는 그림이 완성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어요. 매번 ‘이것이 마지막이다’라는 생각으로 임해요. 그러면 있는 아름다움을 관객에게 어떻게든 다 전달하려고 하게 되거든요.“
여전히 손에서 활을 놓지 않는 거장은 평생을 바쳐 성취해온 음악이란 예술의 성채를 바라보고 있을까.
“과거엔 말도 못할 정열로 음악을 대했다면 지금은 안정이 돼서인지 사랑과 평화를 위해 음악을 해요. 평화가 있으려면 사랑이 듬뿍 담긴 생활을 해야 하잖아요. 뭘 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편한 인사로 들리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겠죠. 내가 가장 사랑하는 관객들이 자신의 현실에서 벗어나 음악에 빠져 들도록, 나의 음악이 위로로 다가가길 바라죠. 한명 한명이 그런 걸 들을 자격이 있는 분들이에요. 각자의 나이를 떠나 얼마나 힘들게 생활하는 사람들인데...”
새 앨범 발매와 함께 콘서트로 관객과 만난다. 오는 30일에는 통영국제음악제 개막공연에 올라 보훔심포니오케스트라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오는 6월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갖는 바이올린 리사이틀에서는 케빈 케너와 함께 새 앨범 수록곡을 선보일 예정이다.
사진= 워너뮤직코리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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