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B급 열광, 공포·SF 별로”
지난해 ‘차이나타운’에 이어 누아르 액션영화 ‘소중한 여인’ 촬영을 지난 4월에 마쳤어요. 범죄조직 2인자 나현정 역인데 굉장히 잔인하고 세요. 리얼 베이스 혹은 영화적 설정이 있는 작품을 가리진 않으나 개인적으로 누아르, B급영화를 좋아해요. 쿠엔틴 타란티노의 ‘펄프픽션’에 열광했는데 ‘킬빌’은 아직 못 봤어요.
대모와 조직 2인자, 의도적인 캐릭터 및 장르 선택은 아니고,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 중 누아르가 꽤 있더라고요. 공포영화는 잘 못봐요. 제가 출연한 작품조차도. SF엔 특별히 호감은 없고요. 인간의 감정 및 변화를 체감하는 작품을 선호하죠.
“내가 사랑했던 차수현”
‘시그널’의 여형사 차수현을 너무 사랑했어요. 이 작품은 4부 대본까지 보고 선택했어요. 캐릭터의 진폭도 있고, 연기할 여지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초반엔 경찰로서의 기능, 미제사건 중심이었는데 중반으로 가면서 피해자와 주요 인물들이 연계되면서 주역 3명이 직간접적으로 어떤 사건의 피해자인 설정이 명료해지더라고요. 작가님이 언급해주지 않아서 처음엔 몰랐는데 너무 좋았죠.
배우로서 차수현의 연기 확장이나 가능성보다 피해자 관점에서 모든 게 시작돼 진행되다가 끝나는 작품을 만난 적이 없었기에 너무나 의미 깊은 작업이었어요. 장르에 매몰되고 전형성을 띠기 쉬웠던 작품이었는데 이를 너끈히 뛰어넘었잖아요. 이런 주제의식에 동참할 수 있었던 게 행복하죠.
“지난해와 올해, 배우인생 화양연화”
의도한 게 전혀 아니었는데 지난해와 올해는 충만한 해가 됐어요. ‘굿바이 싱글’ 뒤에 ‘소중한 여인’ 촬영이 잡혀 있어서 ‘시그널’은 못하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런데도 제 일정에 맞춰 대본을 써주셨어요. ‘굿바이 싱글’ 끝내고 딱 3일 쉰 뒤 곧장 ‘시그널’ 촬영에 돌입해 2개월 2주 만에 16부를 하루도 쉬지 않은 채 다 찍었죠. 좋은 팀들을 연이어 만난 덕분이에요.
늘 초집중 상태였고 잠을 못 잤으나 제대로 일하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앞으로도 이런 일은 없을 거 같아요. 작품들이 각자 색깔이 뚜렷했으니 배우로서 이 만큼 행복한 게 어디 있겠어요. ‘시그널’이 너무나 사랑한 차수현이 있었다면 ‘굿바이 싱글’은 운명 같은 영화고, 홍콩 누아르 세대인 제가 ‘소중한 여인’은 늘 꿈꿔왔던 작품이죠.
“이성친구 원츄, 세대초월 동성친구 예스”
극중 스타일리스트 평구(마동석)와는 ‘불알’친구로 나오죠. 대학 동기라든가 연기하면서 친해진 남자친구들은 있지만 성을 초월해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의지하면서 서로 위로해 줄만한 남자친구는 없어서 매우 부러워요. 동성친구와는 미묘하게 다른 부분이 있어요. 그런 친구 가지고 싶죠. 대신 영화 속 단지처럼 세대를 초월해 연대하는 동성 친구는 있어요. 단톡방 막내가 영화 ‘2층의 악당’에서 제 딸로 출연했던 10대 배우 지우예요. 같은 모임에서 동등하게 소통하며 지내죠.
“투 케이트, 천우희, 김고은”
여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멋진 외모와 더불어 기품이 있어요. 케이트 윈슬렛은 블란쳇과 또 다른 품위가 있고요. 평범하거나 밑바닥 인생 캐릭터를 맡아도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기품이 묻어나와 굉장히 강렬한 에너지를 부여하더라고요. 연기 외에 특별한 감동을 주는 요인이죠. 그건 그 배우가 주는 고유의 아우라인 거 같아요.
천우희는 그 배우의 작품을 많이 보지 못했어도 너무 좋은 배우의 얼굴을 가지고 있어요. 차근차근 잘 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김고은도 좋은 태도와 기질을 가지고 있고요. 이런 배우들이 흔치 않기에 잘 성장했으면 좋겠어요.
“몇 번씩 고꾸라지더라도 버틸 것”
이들이 성장 과정에서 몇 번씩 고꾸라질 거예요. 대중의 기대와 환상을 와르르 무너뜨리는 순간도 찾아들 거고요. 그렇다고 포기하지 않았으면 해요. 좋은 배우는 시간을 두고 성장하거든요. 그 시간에서 배우는 버티고 해내야 해요.
저도 그랬어요. 꽤 오랫동안 “어떤 캐릭터를 맡든 김혜수만 보인다”는 혹평을 들었으나 기다려준 업계 관계자들, 관객이 있었기에 성장한 거죠. 물론 한 때는 이런 사실을 몰라서 두려웠고 좌절했죠. 운 좋게 기회들이 주어졌고, 그 속에서 미션을 완수하며 발전한 거죠. 아직까지도 나의 가능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배우는 평가 받는 직업이라. 지금 이 순간이 빛나건 어둡건 우리의 일과 삶은 ing잖아요. 대중문화 속에서 한 명의 아티스트가 성장하기 위해선 대중이 개입해야 하며, 지켜봐주는 게 정말 중요하다고 여겨요. 배우 개개인의 노력은 기본이고요.
P.S. “언제쯤 굿바이 싱글할 거냐고요?”
사실 결혼은 인간 김혜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이겠죠. 일부러 외면할 것도 없고, 그것보다 우선되는 것도 없을 거예요. 기회가 온다면 당연히 할 거예요. 안올 수도 있겠죠. 우리가 마음먹은 대로 세상일이 되진 않잖아요. 그래서 재미가 있는 거고.
Your Sincerely
사진-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