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 왕’으로 군림했던 CJ엔터테인먼트가 부진의 늪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지난 십수 년 간 흥행코드를 만들어내며 무수한 ‘대박’ 영화를 터뜨렸던 CJ의 아성에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마저 나오는 중이다.
 

영화팬들에게 CJ엔터테인먼트 이미지는 ‘흥행 황소개구리’였다. CJ가 배급한 ‘해운대’(2009),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명량’ ‘국제시장’(2014), ‘베테랑’(2015) 등 5편의 천만 영화가 이를 웅변한다. 하지만 2016년부터 'CJ표 영화'의 천만흥행은 찾아볼 수 없다. ‘천만’이란 숫자로만 흥행을 논하는 게 가혹해 보이기도 하지만, 매년 천만 영화를 찍어냈던 CJ이기에 ‘천만 없는 CJ’가 어색해 보이는 것 역시 사실이다.

오랜 시간 CJ가 흥행에 강세를 보여온 건 크게 2가지 요인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첫째로는 국내 상영시장의 48.7%의 점유율을 차지하는 멀티플렉스 극장 CGV란 막강 배급력이다. 좋게 말하면 ‘접근성’을 극대화시킨, 나쁘게 말하면 ‘관객 몰아주기’라는 방법으로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시켜 흥행을 만든 것이다. 물론 이 방법은 앞선 영화들이 ‘상업영화’로서 빼어난 재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런저런 논란에도 CJ 영화가 오랜 시간 사랑을 받아왔던 이유는 관객들이 원하는 코드를 정확히 찌르는 트렌디함이었다. 돌이켜보면 ‘해운대’는 당시 한국영화사상 가장 압도적인 비주얼로 트렌드를 선도했고, ‘국제시장’은 주류 극장 소비자로 여겨지지 못했던 중장년층을 적극적으로 공략했고, ‘베테랑’은 땅콩회항 등의 사건으로 ‘갑질’에 대한 대중의 공분을 저격했다. 시대에 꼭 맞는 메시지와 기술력으로 ‘흥행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최근 극장가 흐름을 살펴보면, CJ 코드가 더 이상 관객들의 관심을 못끌고 있다. 최근 ‘그것만이 내 세상’(최종 관객수 341만6958명)을 제외하고, 야심차게 선보였던 ‘골든슬럼버’(138만7562명), ‘궁합’(133만9712명)이 손익분기점 돌파에 실패했고, 제작비 100억의 ‘7년의 밤’은 손익분기점에 한참 못 미치는 50만 수준에서 만족해야할 처지에 놓였다.

지난해 260억대의 제작비가 투입된 ‘군함도’(최종 659만2170명)와 155억이 들어간 ‘남한산성’(384만1443명)이 각각 여름, 추석 대목을 천만 관객을 노리고 개봉했지만, 손익분기점도 넘기지 못한 채 흥행 참패했다. 물론 지난 겨울 ‘1987’이 나름 선전했지만 롯데엔터테인먼트의 천만영화 ‘신과함께’에 압도적으로 밀린 것을 봤을 때, CJ 영화는 분명히 슬럼프에 빠져있다. 그 이유는 무얼까.

 


한 영화관계자는 “CJ는 확고한 틀에 박힌 영화만 만든다. 마치 천만영화 포맷 같은 게 있는 듯 이것저것 다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 같다”고 이유를 분석했다. 생각해보면 ‘군함도’와 ‘남한산성’은 5년 전 관점에서 봤을 때는 분명 ‘천만급’ 영화다. 압도적 스케일의 비주얼, 스타급 배우들의 멀티캐스팅, 정치적 성찰을 남기는 메시지가 가득하다. 하지만 이 모든 요소가 기대감보다는 관습적인 익숙함과 무거움으로 다가왔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달리 말하면, 흥행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으로 변화를 거부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조금만 주의 깊게 박스오피스를 분석한다면, 최근 관객들의 취향과 정서가 변화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가깝게는 스타급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는 실험적인 오락영화 ‘곤지암’ ‘범죄도시’ 등이 관객들의 선택을 받았고, 심지어 요즘엔 ‘지금 만나러 갑니다’ ‘리틀 포레스트’ 등 적은 예산이 투입된 논스펙터클 영화들이 대박을 치기도 한다.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으로, 메시지보다는 재미로 관객의 취향은 'LTE'처럼 빠르게 변하고 있다.

반면 CJ는 ‘명량’ ‘국제시장’ 등에서 이어지는 흥행코드를 고스란히 답습한 ‘기획영화’만 선보이고 있다. ‘군함도’ ‘남한산성’ ‘1987’ ‘7년의 밤’ 등 무거운 메시지, 막대한 제작비의 작품만이 흥행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에 한 영화관계자는 “소재, 장르 상의 다양한 시도를 하지 않은 채 기획영화들만 추구하는 듯 보인다. 한마디로 기획영화의 한계다”라고 꼬집었다.

 


CJ가 이렇게 부진한 사이, 2등 그룹의 투자배급사들이 CJ의 아성을 넘보고 있다. 오랜 부진에 시달렸던 롯데엔터테인먼트는 지난해 말 정치적 메시지를 배제한 신파 오락극 ‘신과함께-죄와 벌’로 역대 2위 흥행 기록을 세웠고, 쇼박스는 5.18이라는 무거운 소재를 그리 무겁지 않게 풀어낸 ‘택시운전사’로, 뉴(NEW)는 재작년 실험적인 좀비 액션영화 ‘부산행’으로 잭팟을 터뜨렸다. 이들은 모두 천만영화의 익숙한 관습을 깨고 나온 작품이라는 점에서 주목 받았다.

CJ는 올해도 여러 대작들을 연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1997년 남북수뇌부의 은밀한 거래를 감지하며 벌어지는 첩보 드라마 ‘공작’(감독 윤종빈), 서울지방 경찰청 위기 협상팀이 인질범과 대치하며 벌어지는 스릴러물 ‘협상’(감독 이종석), 판문점 지하 벙커 회담장에서 벌어지는 전투액션 ‘PMC’(감독 김병우) 등이 출격을 대기하고 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간다’는 말이 있다. 공교롭게 CJ는 2015년 여름 ‘베테랑’ 이후로 천만영화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CJ가 3년의 부진을 깨고 다시 한 번 ‘흥행 명가’로 날갯짓을 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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