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국내 초연 때 앙상블인 애니 역으로 참여했는데 20년이 흘러 주역 도로시로 출연하게 됐네요.”

 

 

빅 마우스에 가득 머금은 미소, 에너지 넘치는 국내 뮤지컬 1세대 여배우 최정원(47)을 만났다. 16일 정오 예술의전당 CJ라운지에서 이뤄진 사진촬영에선 도발적인 포스가 스스럼없이 튀어나왔다. ‘시카고’의 벨마 느낌 물씬!

오는 23일 개막하는 ‘브로드웨이 42번가’(8월28일까지·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한물 간 여배우 도로시 브룩 역을 맡은 그는 인터뷰석에 앉자마자 거침없는 언변을 이어갔다.

 

■ ‘브로드웨이 42번가’ 부드러운 카미스마 여배우 열연

“20대였던 당시 ‘언젠간 꼭 도로시 브룩을 할 거야’라고 다짐했는데 마침내 그 꿈을 이뤘어요. ‘왜 이제야 하게 됐지’란 생각도 들지만, 예전이었다면 지금의 도로시 느낌을 못냈을 거예요. 다른 작품들을 통해 연기의 디테일을 찾아냈기에 보다 입체적인 연기가 나오지 않나 싶어요.”

쇼 뮤지컬의 대명사로 꼽히는 ‘브로드웨이 42번가’는 1930년대 미국 대공황기를 배경으로 대형 뮤지컬 ‘프리티 레이디’ 제작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다. 스타를 꿈꾸는 코러스걸 페기 쇼어(임혜영)와 그녀를 질투하다가 포용하게 되는 도로시가 극을 주도한다. 기존 도로시의 경우 대스타다운 카리스마가 강조됐다면, 최정원의 도로시는 부드러운 가운데 감정의 디테일을 부각한다.

“과거엔 도로시를 자기 밖에 모르는 못된 선배로 생각했어요. 지금은 사랑에 가장 굶주려 있는 여성스러운 캐릭터로 다가와요. 그동안 씩씩하고 자유분방한 역할을 많이 했기에 오랜만에 이런 캐릭터를 맡아서 신선하고요. 대부분 여자는 사랑 받기를 원하잖아요. 그래서 도로시를 사랑에 굶주린, 사랑의 메신저로 받아들이는 중이죠.”

 

 

작품 예찬을 빠트리지 않았다. 시간에 비례하는 화려한 칼군무와 탭댄스를 가장 먼저 꼽았다. 개막 3개월 전부터 연습에 들어간 앙상블 및 페기(임혜영), 빌리(에녹) 역 배우들의 완성형 리허설을 보고 눈물이 났다.

“일사불란한 탭 소리에 심장이 움직일 거라 믿어요. 특히 토월극장처럼 작은 공간에서 디테일한 연기, 미세한 떨림까지 느끼게 해드리고 싶죠. 배우들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온다면 개막하고 나서 반응이 좋을 것 같아요. 열심히 살아가는 관객에게 ‘당신의 꿈은 어디쯤 와 있느냐’고 질문함으로써 ‘쇼 뮤지컬인데도 감동이 있네’란 평가를 받기를 원하죠.”

 

■ 28년 무대인생...‘시카고’ ‘맘마미아’ 인생 캐릭터

1987년 롯데월드예술단에 입단, 89년 뮤지컬 ‘아가씨와 건달들’로 데뷔했다. 28년째다. 젊은 여주인공을 맡지 못하게 될 즈음엔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여동생을 살해한 여죄수 벨마 켈리(시카고), 중년의 싱글맘 도나(맘마미아)가 다가왔다. 농염한 팜므파탈 벨마가 레드라면, 씩씩하고 긍정적인 도나는 블루다. 투톤 캐릭터를 각각 16년, 10년째 인생 캐릭터를 연기하며 왕좌를 지켜왔다.

“고교 졸업 전 시작해서 독학을 많이 했어요. 알고 싶은 욕망에 관련 서적들을 찾아가며 브레히트, 메소드 연기를 공부했죠. 무조건 잘 해야 한다는 강박, 연습만이 살길이라며 달려가기 바빴어요. 감사하게 계속 주인공을 맡았고요. 체력은 떨어졌겠지만 노래와 춤은 젊었을 때보다 더 잘해요. 무엇보다 연기가 달라졌죠.”

어떻게 하면 소리를 더 높이 올릴지에 매달렸고, 그래야 관객이 좋아할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 앞의 드라마를 잃게 되는 걸 깨달았다. 축구경기로 치면 내가 스트라이커이고 싶은 욕심에 자꾸 골을 넣으려 했다. 지금은 굳이 다른 선수가 골을 넣으면 더 행복해질 수 있게 됐다. 어시스트의 매력을 체화했단 말을 한다.

 

 

“진짜 화났을 땐 소리가 작게 나오고, 극한의 슬픔에선 헛웃음이 나오기도 하잖아요. 예전엔 절절하게 울고 소리 질렀는데 오래 연기하다보니 작은 것이 굉장히 강함을 알게 되더라고요. 어떤 분들은 ‘에너지가 떨어진 게 아니냐’고도 하세요.(웃음) 절정이 아닌데서 굳이 에너지를 쏟을 필요가 없죠. 마지막 한 번의 에너지를 계산하면서 연기해요. 대본에 나와 있지 않은 서브 텍스트의 감정을 생각하면서요.”

 

■ “배우는 철학자...타인의 삶 변화”

3년 전 뮤지컬 ‘아이다’를 관람했을 때, 객석에서 비운의 공주 아이다 역 차지연의 1막 엔딩 넘버를 들으며 오열했다. 그냥 소리를 지르는 게 아니라 나라를 잃은 자의 아픔을 정확하게 전달했기 때문이다. 굉장한 전율이었다. 누군가도 자신의 공연을 감동을 얻기를 소망했다.

“배우는 철학자예요. 작가가 원하는 메시지를 통찰한 뒤 연기를 통해 누군가의 인생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려면 일반인보다 더 많이 고민하고 스스로를 채찍질 해야죠. 많은 걸 보고 알아서 앞서가는 아티스트가 돼야 하고요. ‘나 연기 잘했지’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을 뜨겁게 만들고 행복해지도록 하는 게 배우의 소망이자 역할 아닐까요.”

독일 작가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 중 “노력하는 자는 방황한다”라는 대사가 있다. 단 한 줄의 대사를 곱씹곤 한다.

 

 

“내가 많이 외로웠던 것도 그것 때문이었구나, 명료해졌어요. 나이가 들수록 ‘내가 맞다’가 아니라 자신을 의심하는 게 필요해요.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 ‘틀리면 꼭 얘기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그래서죠. 뮤지컬 1세대 배우로서 역할을 묻곤 하시는데 후배들에게 당부하는 말이 ‘노래 잘하는 게 우선이 아니라 이 노래를 왜 부르는지를 고민하라’예요.”

 

■ 내년 ‘빌리 엘리어트’ ‘선셋대로’ 도전

“처음 뮤지컬을 시작할 때처럼 지금도 공연할 때 설렌다”는 그는 여전히 신작 오디션을 열정적으로 노크한다. 무수한 지원자들과 함께 심사위원들 앞에서 대사를 치고, 노래와 춤을 춘다. ‘브로드웨이 42번가’ 이후 내년에 배우 최정원의 가슴을 달뜨게 하는 작품은 ‘빌리 엘리엇’과 ‘선셋대로’다.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탄광촌 소년 빌리의 꿈을 키워주는 무용선생 윌킨슨 부인 역을 맡았다. 글로리아 스완슨 주연의 고전영화로 잘 알려졌으며 브로드웨이 뮤지컬로도 각광 받은 ‘선셋대로’에서는 과거의 환상 속에 사는 한물 간 60대 여배우 노마를 열연한다.

“주인공을 고집하진 않지만 뮤지컬계가 발전하면서 이제는 60~70대 배우들이 중심이 되는 작품들도 나오고 있으니 기쁘죠. 연극배우 박정자 선생님처럼 70대가 돼서도 무대를 든든하게 지키는 배우이고 싶어요. 가장 행복해지는 시간이 무대에 있을 때라 노년이 기다려져요. 그 즈음되면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내 무대인생의 절정기를 맞지 않을까요?”

 

사진 권대홍(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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