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배우 안성기(65)가 각별한 작품 ‘사냥’(감독 이우철)을 만났다. 데뷔 60주년이 되는 내년에는 더욱 특별한 작품이 기다리고 있다.

‘사냥’은 탄광촌 도시를 배경으로 어느 날 오후부터 그 다음달까지 16시간 동안 일어나는 이야기다. 자식들과 떨어져 지내며 매일 산을 누비며 살아가던 기성이 외지인 엽사무리와 맞닥뜨리며 숨 막히는 추격전을 벌이게 되는 내용이 긴박하게 펼쳐진다. 늘 젠틀한 이미지에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던 안성기는 치렁치렁한 백발에 들짐승처럼 매서운 눈빛을 쏘며 야산을 누빈다.

 

■ 상처 받은 남자의 액션향 물씬 

“기성은 내 이름을 거꾸로 한 이름이다. 그런 인물을 만들었다는 게 너무 좋았고, 시나리오의 완성도가 높아서 기쁜 마음으로 합류하게 됐다.”

기성의 트라우마 부분과 스피디한 추격 면의 조화가 가장 큰 관심사였다. 전자는 이 영화의 새로운 면이고 후자는 여타의 영화에서 많이 다뤄져왔다. 상업적 판단을 해야 하는 제작사와 감독은 자칫 영화가 무겁고 어두울 수 있기에 추격을 많이 살렸다.

“새로운 면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느낌이라 작품성 면에선 차별화가 덜 된 부분이 있다. 반면 영화적 재미는 커진 느낌이다. 가장 주력했던 건 기성의 변화가 잘 느껴지도록 하는 거였다. 다음으로는 인간의 잔인함이었다. 기성과 엽사무리의 추격전을 통해 자신을 감추고 고립돼 살아가던 사람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던 대상을 위해 희생하면서 오히려 자유로워지는 심리적 변화를 드려내고 싶었다.”

 

■ ‘고뇌하는 람보’ 별명 얻어

그답지 않게 욕심이 끓어올랐다. 캐릭터를 구축하는 장치로 가발을 착용하고 수염을 길렀다. 점차 산발이 돼가는 백발의 색깔과 형태까지 일일이 관여했다. 촬영 전에는 체력훈련과 사격훈련에 매진했다. 엽총을 쏴야하기에 사격장에서 감을 익혔다. 견고한 체력과 근육질 몸매에 후배 남자배우들이 혀를 내둘렀다. 그런 고민이 집약돼 표출된 장면이 폭포신이다. 장총을 든채 물속에서 솟구쳐 나오는 그의 모습은 람보를 연상케 한다. 

“너무 할리우드 냄새가 나니까 ‘상처 받고 고뇌하는 람보’라고 해주면 좋겠다.(웃음) 폭포에선 한 마리 들짐승 모습으로 보였으면 했다. 자신을 둘러싼 껍질을 다 벗고 본모습을 드러내는 대목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가장 아쉬운 점은 촬영이 겨울에 이뤄져 웃통을 벗지 못한 거다. 딱 벗었어야 했는데. 하하. 대신 첫 등장 신에서 민소매 러닝셔츠 차림으로 나온다. 젊은 친구들과 대적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몸이라 설득력을 부여해준 것 같다.”

여태까지 해온 영화 중 가장 액션이 많았다. 목 디스크란 훈장을 얻기까지 했다. 활시위를 당긴 ‘무사’, 만화적 액션을 구사한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이 있었으나 이토록 강도가 세진 않았다. 특히 단순 액션뿐만 아니라 마음 속 상처를 내재하고 액션을 하니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 안성기는 “액션을 충분히 소화할 수 있어서 행복하단 얘기를 자꾸 하게 된다”고 흥부자 목소리를 냈다.

 

■ “한결 같은 영화인생, 난 쉬웠다”

1957년 ‘황혼열차’로 데뷔했다. 군 제대 후 성인배우로 활동한 기간으로만 쳐도 40년이 된다. 한국영화 역사와 함께해온 세월이다. 아역, 청춘배우, 중년을 지나 노년의 배우가 될 때까지 연기나 사생활 면에서 대중의 기대와 신뢰를 배신한 적이 없다.

“나한텐 쉬웠다. 영화 외에는 크게 유혹이 되지 않았다. 영화를 너무 좋아했고, 인정받기 시작하니까 고마웠다. 다른 거를 쳐다볼 여유도, 필요성도 없었다. 변함없는 영화에 대한 사랑이 초심을 잃지 않은 원동력이다. 세상이나 환경이 변하면 자신도 변하게 마련인데 그런데 영향 받지 않고 계속 이 일만 해오니 대중에게 믿음을 준 거 같다. 본업에서 벗어나 한눈팔기도 하는데 그러다보면 사람들로부터 잊혀지거나 외면당한다.”

특히 지난해 이후 임권택 감독의 ‘화장’, 할리우드 진출작 ‘제7기사단’, 장률 감독의 예술영화 ‘필름시대 사랑’,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은 한국·영국 합작 다큐멘터리 ‘벌레의 눈물’ 내레이션 등 다양한 시도를 왕성하게 펼치는 중이다. 중년 이후 액션배우로 거듭난 할리우드 스타 리암 니슨이 그와 동갑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화제가 됐는데, 니슨 못지않은 활약상이다. 

“외국에는 이 나이에 열심히 활동하는 배우들이 많으나 국내에선 계속 활동하는 감독, 배우 분들이 거의 없다. 밑에 배우들도 나이차가 어느 정도 나는 상황이다. 쉬지 않고 활동할 수 있다는 자체가 신이 난다. 감사한 일이고.”

 

■ 데뷔 60주년 기념작 ‘매미소리’에서 다시래기 변신

5년 전부터 ‘워낭소리’ 이충렬 감독과 ‘매미소리’란 작품을 준비해오고 있다. 진도의 다시래기꾼으로 살며 무형문화재 전수자가 되고자 외길 인생을 고집한 아버지 덕배와 딸 수남의 이야기다. 데뷔 60주년이 되는 내년에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간다.

“다시래기는 상가에 가서 상주를 위로하고 상가 분위기를 즐겁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다큐가 아닌 극 같은 내용이며 무형문화재 보유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굉장히 좋은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 반면 캐릭터가 매우 난해하다. ‘사냥’에선 상처받은 남자와 액션이 힘들었다면 여기선 소리, 춤동작, 걸진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해야 한다. 무지 어렵지만 해보고 싶은 욕망이 꿈틀댄다. 타령은 계속 연습하는 중이다. 현재 덕배에 빠져 있다.”

현장에서 그의 위치는 ‘탑’이다. 감독, 배우, 스태프 모두 그보다 어린 사람들이다. 개저씨, 꼰대가 사회 담론으로 떠오른 시대에 배우 안성기는 어떻게 포지셔닝 돼있을까.

“내가 친근감을 가지고 친구가 돼야 그쪽도 마음을 터놓는 친구로 다가온다. 스스로를 선배라 여기면 상대방도 선배로만 취급한다. 약간 막이 쳐지거나 금이 간 상태로 가는 건 자기한테 달린 문제다. 윗사람이 먼저 다가가야 한다. 상대에게 원하는 건 무리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체적으로 재미나기 때문이다. 반면 나이 든 사람들은 외롭고. 물이 위로 올라오나? 흘러 내려가지. 그런데 역류해달란 건 말이 되질 않는다. 나 역시 젊었을 땐 몰랐다. 하하.”

 

■ “유니세프 봉사활동, 나의 삶 도와주는 일”

1992년부터 25년째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일하고 있다. 해외 구호 현장을 다니면서 봉사활동을 펼치는 중이다. 지난봄에는 동티모르, 오는 8월말에는 동남 아프리카를 방문한다.

“유니세프는 게을러지는 삶에 한껏 자극을 준다. 현장에 가보면 ‘내가 너무 편하게 살고, 모든 걸 잊고 살았네’란 생각을 고취시킨다. 그곳에선 어서 빨리 귀국하고 싶을 정도로 힘드나 곧 ‘잘 살아야겠구나’ ‘더욱 주위를 둘러보며 살아야겠구나’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이렇듯 늘 자극을 받으며 사니 유니세프는 내가 봉사활동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나의 삶을 도와주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사진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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