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동네에서 나고 자란 후계동 사람들에게는 서로의 인생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숨어 있다. 이들이 매일밤 술잔을 기울이는 정희네 술집에도 암묵적인 약속이 있다. 속세를 떠나 불자의 길을 선택한 윤상원(박해준 분)을 언급하지 않는 것. 그는 이미 20년도 전에 후계동을 떠났지만 언제나 존재하는 인물이다. 적어도 정희(오나라 분)가 후계동에 거주하고 있는 이상.
 

이 오랜 침묵을 깨트린 사람은 바로 조애련(정영주 분)이였다. 비록 박상훈(박호산 분)과 이혼했지만 조애련은 여전히 이들 가족의 일원이자, 박동훈(이선균 분)과 정희의 동창이기도 했다. 박동훈의 상무 승진을 축하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에 참석한 그녀는 정희를 위해, 혹은 서로의 편의를 위해 오랫동안 금기시 된 윤상원의 이름을 외쳤다.

조애련의 입에서 윤상원의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정희네 술집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는 27년 친구로 살았던 윤상원을 왜 금기어로 만드냐고 정희를 책망하며 “윤상원은 금기어가 아니다.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라고 말했다. 정희 역시 마지못해 “오늘부로 윤상원을 금기어에서 해금한다. 불러, 마음껏 불러”라며 “윤상원은 우리의 추억이다”라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녀의 말끝에 실린 울분은 모두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보다 앞서 정희는 윤상원, 아니 이제 겸덕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를 찾아갔다. 애초에 윤상원과 마주할 생각은 아니었다. 그의 설교에 들어간 정희는 맨 뒷자리에 앉아 가만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윤상원은 “내 마음이 좋으면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라며 “제가 옛날에 마음이 아주 죽겠어서 토굴에 가서 사흘 밤낮을 기도하는데 그냥 마음이 풀렸어요. 밖에 싫은 게 하나도 없어요. 염소새끼도 예뻐서 한참을 쳐다보고 풀때기도 예쁘고 그냥 다 예뻐요. 싫은 게 없어요”라고 말했다.

그가 떠난 후 20년 남짓한 시간을 지옥 속에서 보내온 정희에게 윤상원의 말은 상처가 되어 돌아왔다. 설교가 끝난 후 정희는 자신을 먼저 발견한 윤상원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나 온몸이 다 아파 안 아픈 데가 없어. 아침에 눈 떠지는 게 싫고 눈 뜨면 눈물부터 나. 네가 오면 안 아플 거 같아. 그러니까 와”라고 말했다. 혼자 늙어죽기 싫다는 정희의 애절함에도 윤상원은 그저 “밥 먹자 가자”라며 등을 돌리려고 했다. 감정이 폭발한 정희는 “염소 새끼도 사랑하고, 풀때기도 사랑하면서 나는 왜 안 사랑해? 너 여기서 득도 못해. 나같은 지랄맞은 여편네랑 살아봐야 득도 하지. 이런 산골에 쳐박혀서 득도 못해. 내려와 여기 확 다 불질러 버리기 전에 내려와”라고 성토하며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정희가 돌아간 후 윤상원은 박동훈에게 연락을 했다. 혼자 있을 정희가 걱정되기는 윤상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에 박동훈은 요순(고두심 분)에게 정희네 술집에 가볼 것을 부탁했다. 짜증이 나서 눈물이 날 거 같다는 정희의 말에 요순은 “드나드는 손님 중에 아무나 하나 찍어서 혼자 좋아해. 그 놈 먹일 생각하면, 그 놈 볼 생각하면 몸은 힘들어도 짜증은 안 나”라며 “헤어진 지 20년이면 결혼을 해도 너댓번은 했겠구만, 어떻게 만날 수도 없는 놈을 여적 마음에도 못놓고”라고 속상한 마음에 큰소리를 쳤다.

사랑이 없어 떠났다는 정희의 생각과 달리 윤상원은 마음 속 깊이 그녀를 묻어뒀을 뿐이었다. 앞서 절을 찾아온 박동훈을 데려다 주기 위해 정희네 술집 앞까지 갔을 때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앉은 채로 몇 시간을 망설였다. 정희가 절에 다녀간 후에도 윤상원은 흔들리는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문을 걸어 잠그고 어두운 방안으로 자진해서 걸어 들어갔다.

지난 20년은 정희에게 멈춰진 시간이었다. 윤상원은 젊은 날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토록 자신을 피해다니던 윤상원을 보고 돌아온 정희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준비를 시작했다. 어쩌면 정희의 시간이 20년 전에 멈춰버린 건 단 한 번의 만남, 그가 잘 살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서가 아니었을까. 정희는 가게를 정리해야겠다며 “날 밝을 때 쯤이면 타닥타닥, 사람들 발 소리가 들려. 이불 속에서 듣는 그 소리가 그렇게 쓸쓸할 수가 없다? 나만 굴러가고 있지 않은 느낌”이라고 털어놨다. 이제 다시 ‘윤상원’ 이름 석자를 입에 올릴 수 있게 된 정희가, 그리고 평안 속에 정희에 대한 미안함과 속죄의 마음을 숨기고 있는 겸덕의 시간이 아프지 않기를 기원한다.

사진=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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