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넌 취미가 뭐니?”라는 질문에 “영화감상” 이외의 다른 대답을 듣기 참 어렵습니다. 그만큼 영화가 우리 일상 속에 폭 들어와 있다는 의미겠지요. 저 또한 자칭 ‘영화 마니아’로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감상러’들과 조금 더 이야기를 해보면 대부분은 잡식성 관람이 아니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편식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사실 조금은 아쉽습니다. 이 아쉬움은 제 오타쿠 같은 취향을 자랑할 수 없어서 드는 게 아니라, 그만큼 대중이 한국영화에 대해 상대적으로 적은 관심을 두고 있다는 데서 오는 씁쓸함입니다.

올 상반기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1115만7406명‧6월5일 기준)가 무려 천만관객을 돌파했고, ‘블랙팬서’(539만9070명), ‘데드풀2’(367만9663명), ‘코코’(351만40명) 등 4편이 350만 관객을 돌파했지만, 한국영화는 ‘독전’(380만4356명) 정도를 제외하고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찾아보기 위해서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와 한국 대작 영화들의 차이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어마어마한 제작비 차이에서 오는 비주얼 퀄리티는 비교할 수 없는 부분이지요. 그러나 이를 제외하고도 둘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어벤져스3’ ‘블랙팬서’, 그리고 6일 개봉한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는 어쩌면 태생적으로 흥행할 수밖에 없는 작품이었는지 모릅니다. 이미 많은 마니아층을 두툼히 쌓아두고 있는 시리즈 무비라는 점 때문이지요. 그러나 단순히 인기 많은 전작의 힘에 기대기만 하진 않습니다. 최근의 작품들은 어떻게 하면 기존 팬에 신규 팬까지 유입할 수 있는지 고심한 흔적들이 여실히 보입니다.

 

바로 캐릭터 서사에 관객들을 몰입 시키는 ‘체험형’ 영화로 변신을 꾀한 점입니다. 과거 ‘다크나이트’(2008), ‘혹성탈출’ 리부트 시리즈, ‘토르: 천둥의 신’(2011), ‘퍼스트 어벤져’(2011) 등 주인공들의 심적 고뇌 서사에 몰두한 작품들이 인기를 끈 바 있지만, 최근의 블록버스터들은 이 서사적 측면을 최대한 축소합니다.

이를 위해 영화들은 역동성과 현장감에 극히 집중합니다. 이때 가장 돋보이는 건 역시나 연출적 부분이지만, 더 중요한 건 서사적 측면에서 주인공의 동기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큼직한 스토리만 남겨두고 자잘한 가지는 다 쳐내는 지점입니다. 위기-해결 방법 탐구-극복, 이 세 가지의 큰 부분만 있어도 관객들은 자연히 영화 세상에 빠진다는 자신감이 있는 듯합니다. 연출은 부수적인 것이고요.

대표적으로 ‘블랙팬서’에서는 티찰라(채드윅 보스만)나 빌런 킬몽거(마이클 B. 조던)가 서로의 가치관을 두고 싸우는 가운데, 굳이 상대를 이해하려는 태도나 심적 고뇌를 그리 크게 조명하진 않습니다. 다만 서로는 적이고, 자신의 가치를 달성하기 위해선 싸워 이겨야 한다는 점만 강조될 뿐이죠.

상처 입은 돌연변이들의 연대를 그린 ‘데드풀2’에서도 히어로로서 위기를 겪은 데드풀(라이언 레이놀즈)의 성장에 중점을 두었을 뿐, 결말부 뚱보 소년 러셀(줄리안 데니슨)의 갑작스런 변화와 케이블(조슈 브롤린)의 희생은 데드풀의 성장에 따른 결과로써만 다뤄졌지요. 단순해진 서사는 그만큼 새로운 관객들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작이 나올 때마다 더 많은 관객들의 발길을 극장으로 이끌 수 있던 것이지요.

 

반면 100억원대 한국 대작 영화들은 오히려 서사가 가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변호인’(2013), ‘명량’(2014), ‘베테랑’(2015), ‘부산행’(2016) 등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던 작품들의 빅히트에 취한 탓인지 올해 개봉한 100억대 제작비의 영화 중 흥행참패를 맛본 작품들은 다들 묵직한 서사의 벽을 쌓아둡니다. 오락성은 낮아지고 무게감이 늘면서 관객의 외면을 받은 셈이지요.

총제작비 130억의 ‘염력’은 코미디의 외피를 썼지만, 그 내면엔 용산참사라는 사회적아픔 부성애 갑질 국가권력의 폐해 등 다양한 메시지를 담아내려 하며 관객들의 거부감을 샀습니다. 주인공 석헌(류승룡)이 초능력을 얻고서 무엇을 행하려 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는 서사에 영화는 ‘사회비판적 시각’만 담고 있다는 관객들의 혹평을 얻었습니다.

더불어 115억원을 들여 만든 지난해 ‘리얼’은 일반 관객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정신분석학적 시각을, 또 100억원을 들인 ‘7년의 밤’은 자기연민에 빠진 두 인물 오영제(장동건), 최현수(류승룡)가 서로에 대한 복수 동기를 쌓기 위해 너무 많은 전사와 심리를 묘사하며 정작 중요한 당사자끼리의 대결에 소홀하며 '최악의 리메이크'라는 혹평에 시달렸습니다.

 

지난해부터 흥행에 성공했던 ‘신과함께-죄와 벌’ ‘곤지암’ ‘독전’ 등이 자잘한 서사는 배제하고 비주얼, 액션, 연출을 통해 관객의 흥미를 끌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염력’ ‘리얼’ ‘7년의 밤’ 등의 흥행 실패 요인은 더욱 명확해집니다. 명백히 관객들의 취향은 몇 년 전과 확연히 달라졌습니다. 이들의 실패는 과거의 ‘흥행코드’에서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LTE 시대, 유독 한국 대작 영화들은 변화에 상당히 둔감해보입니다. ‘할리우드보다 제작비가 적어서’라는 이유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이미 옛것이 돼버린 흥행코드가 아니라, 이젠 새로움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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