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세의 게임회사 아트디렉터 준희(정해인)는 누나 친구인 35세 진아(손예진)에게 불쑥 불쑥 말했다. “금기를 넘어서야 프로”라고. 이런저런 화제를 양산하고 지난달 종영한 JTBC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여자’는 준희의 말대로 프로였을까. 후일담일 수 있으나 ‘한류’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아마추어리즘이 창궐해온 국내 드라마 업계에서 적어도 프로에 근접한, 프로이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한 드라마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나. 여성 캐릭터 중심의 드라마

제목부터 여성이 주역이었다. 영화·방송계 모두 남자 캐릭터 그리고 남자배우가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게 불문율이다. 흥행과 시청률을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여주는 주역이어도 남주가 주도하는 서사의 보조축 역할을 하는 게 태반이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캐스팅 단계에서 톱클래스 남자 청춘스타들이 어리석게도(?) 줄줄이 출연을 고사한 이유이기도 하다.(영화 ‘밀양’은 여성 캐릭터, 여배우 전도연 중심의 작품이었음에도 국민배우 송강호는 자신의 롤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그의 빛나는 필모그래피 중 하나로 자리하고 있다.)

잘못된 관행이 철벽처럼 공고한 현실에서 30대 여성의 성장기를 제목부터 내용까지 전면에 내걸었다. 금기에 도전한 첫 발걸음이었다.

 

둘. 성 역할 전복 혹은 평등

“울지 말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말했지만 정작 더 많이 울었던 건 준희다. “자기비하하지 말라”고 일침을 가했으나 정작 자신의 비루한 조건을 고민했던 건 그다. 가족의 반대에 대한 걱정 따위는 하지 말라고 호기롭게 말하고, 진아를 스토킹하는 전 남친에게 주먹을 날리는 상남자 면모를 보이나 결정적인 순간에 흔들리고 눈물을 내비치는 인물은 남자 준희다.

반면 평펑 눈물을 쏟다가도 가족과 절친에게 줄줄이 자신의 사랑을 흔들림 없이 웅변하고 설득하는 건 진아다. 사내 성희롱 피해자였으나 3년이나 소송을 이끌어가는 집념을 보인 인물이기도 하다. 유달리 잦았던 키스신·베드신에서도 진아 그리고 손예진은 능동적이었다. 연상연하라는 나이에서 기인한 태도라기보다 ‘남자는, 여자는 이래야 한다’는 성 역할에 대한 관습 그리고 규범을 가뿐하게 깨트렸다.

 

 

셋. 완성된 대본 & 현장의 노동인권

한국 드라마 제작환경의 고질적 병폐로 여겨져 오던 쪽대본이나 하루 20시간이 넘는 비인간적인 노동문제가 없는 현장이었다. 손예진은 사전에 완성된 16부 대본을 모두 읽고 작품과 캐릭터 분석을 끝낸 뒤 촬영에 임했고, 충실한 사전 콘티 덕에 현장에서의 불필요한 촬영을 줄여나갔다.

또한 시청률이 폭등하는 드라마의 경우 시청자들의 거센 압박 및 청원으로 인해 줄거리나 결말이 바뀌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역시 15회에서 남녀주인공이 안타깝게 헤어지고, 준희가 미국에 있는 동안 진아는 새로운 남자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시청자의 거센 비난이 예상됐음에도 김은 작가와 안판석 PD는 ‘안락한’ 타협 대신 원래대로 강행했다. 주인공의 이별과 여주의 선택, 둘의 재회를 둘러싸고 시청자 입장에서 개연성 문제를 충분히 제기할 수 있으나 드라마는 오롯이 작가의 창작물이다. 그가 전하려 했던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고 관철시켰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넷.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

관극의 재미 가운데 하나는 디테일이었다. 숱한 드라마가 리얼리티, 현실연애를 표방하면서도 영화와 달리 방송심의 규정에 따라 흡연 장면을 철저히 배제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순간순간 금기시된 흡연 관련 장면을 보여줬다.

답답함과 분노를 삭이려고 준희가 담뱃값을 꺼내거나 담배꽁초를 땅에 비벼 끄는 장면이 나오는가 하면, 엇비슷한 이유로 건물 옥상이나 회식장소 골목길에서 담배를 태우는(적나라하게 보이진 않으나) 정영인 부장(서정연)의 모습은 예사롭지 않았고, 그 어떤 대사보다 그들의 복잡한 심리를 밀도 높게 드러냈다.

이외 ‘Stand By Your Man’과 같은 올드팝을 테마곡으로 배치해 색다른 감흥을 이끌어낸 음악적 안목, 충분하진 않았으나 싱글 여성의 단면을 결혼·일·우정·혼술과 같은 장치를 통해 그려내려 했던 페미니즘 시각 역시 디테일을 장식한 대목이었다.

사진=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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