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 클릭비 멤버에서 뮤지컬 배우로 ‘명함’을 새로 판지 10년째다. 오종혁(35)이 창작뮤지컬 ‘무한동력’(7월1일까지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 재연에서 대기업 입사가 꿈인 27세 취준생 장선재로 출연 중이다. 외모·재능·스펙 등 모든 게 평범한 인물이다. 그동안 뮤지컬·연극에서 경호원·군인·장교·호위무사 등 각 잡힌 남자 역할을 도맡아왔던 그의 힘 뺀 연기가 궁금해졌다. 공연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어느 날, 그래서 만났다.

 

 

수려한 외모와 수수한 차림의 30대 청년은 가수에서 공연계 배우로 전환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처음부터 무대에서 성장해온 배우 느낌이다.

주호민 작가의 인기 웹툰을 원작으로 한 ‘무한동력’은 주인공 장선재의 솔로 넘버가 많지 않고, 가창력을 뽐내는 곡을 부르지도 않는다. 더욱이 여섯 인물의 분배가 고루 이뤄졌기에 연기력으로 평범함을 뚫고 나와야 한다. 다행히 프로덕션 관계자, 팬들은 “역대 최고 매칭”이라는 호평을 쏟아내는 중이다.

“그간 색깔이 진하고 강한 캐릭터들을 연기해왔어요. 다른 시대, 일어나기 힘든 사건들, 내가 평소 느끼기 힘든 감정들을 연기하다보니 깊은 감정을 쓸어담지 못하는 답답함이 차올랐어요.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이야기, 현재를 살아가는 일상 속 캐릭터를 기다렸죠. 그러다 만난 장선재는 과장 없는 인물이에요. 처음엔 이 친구의 고민이 주변 인물들에 비해서 평범한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어떻게 해야 그의 고민을 관객으로부터 공감 얻을 수 있도록 만들 수 있을까를 가장 고민했어요.”

김동연 연출은 그에게 “뭘 더 하려고 하느냐. 그냥 가만히 있어라”라며 과해지지 말 것을 주문했다.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내고 특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작업에 익숙했던 오종혁에게 그 말이 쉽사리 이해되질 않았다.

 

뮤지컬 '무한동력'의 한 장면 [사진=로네뜨 제공]

“심심해지는 거 아닌가란 고민이었죠. 그런데 장선재는 주변 인물들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해요. 흘러가는 대로 노멀하게 내버려두는 게 자연스럽단 걸 시행착오 끝에 깨닫게 된 거죠. 그동안 내가 깜빡하고 있었던 게 나만 무대 위에 서 있는 게 아니라 6명의 인물들이 무대에 함께 있는데 왜 혼자 하려고 했었나였죠. 그 뒤부터는 에피소드 안에서 이 친구의 행동이 두드러지게 보이도록 색깔을 입혀갔어요.”

1999년 꽃미남 그룹 클릭비로 데뷔했다. 팀 해체 후 방황의 시간을 거치다 2008년 뮤지컬 ‘온에어2’로 무대 데뷔했다. ‘쓰릴미’ ‘오디션’ ‘웨딩싱어’ 등으로 커리어를 쌓아가다 군입대 2013년 해병대 제대 후 숱한 예능 프로그램 제의를 받았으나 내 길이 아니란 판단에 모두 거절했다. 무대를 향해 오롯이 열정을 발산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게 됐다.

그해 출연한 ‘그날들’의 청와대 경호원 무영 역을 시작으로 ‘블러드 브라더스’의 쌍둥이 형제 에디, ‘공동경비구역 JSA’의 남한병사 김수혁 상병, ‘노트르담 드 파리’의 근위대장 페뷔스, 최근 막을 내린 ‘명성황후’의 호위무사 홍계훈으로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갔다. 연극으로도 무대를 확장해 화제작 ‘킬미나우’ ‘프라이드’ ‘서툰 사람들’ ‘홀연했던 사나이’에 출연해 호평 받았다.

 

 

“실력이 있어서 공연계에 들어왔던 게 아니라 지치고 힘들었던 상태에서 우연한 기회에 공연계에 발을 내디뎠어요. 가요계에 있을 땐 상처도 크고 많이 닫혀있었는데 공연계 와서 사람들을 만나며 에너지을 받고, 긍정적이 됐어요. 많이 달라졌죠. 한 작품, 한 작품 해나가면서 연기가 재밌어지기 시작했고 더 잘하고 싶었고 그러다보니 10년이 훌쩍 흘렀어요.”

진짜로 좋아하는 게 뭔지를 알게 됐다. 가수일 때는 무대 위에서 3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뭔가를 들려줬는데 배우가 돼서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존재하며, 가상의 인물을 현실화시키는 액팅을 통해 관객과 즉각적으로 소통하는 짜릿함을 경험했다. ‘인간 오종혁’으로 산다면 느끼지 못할 감정에 살이 떨릴 정도였다. 매일 공연이 끝날 때마다 행복한 일을 하고 있구나 절감했다.

“편하게 연기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항상 어려웠고 부담이 컸죠. 더욱이 매 작품 들어갈 때마다 불안해하고 자신을 혹사시키는 타입이거든요.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였겠죠. 그나마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나를 끌어준 선배, 후배, 연출 등 고마운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다행이고 고맙죠.”

 

 

‘무한동력’과 장선재를 경험하면서 되새기고 깨달은 게 많다. 클릭비 시절,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활동이 불투명해지고 반강제로 홀로서기를 했고 어떻게든 문을 두드려봤으나 노력과 상관없이 큰 벽이 존재했던 아픈 기억을 좌절과 상실감으로 가득한 이 시대 20대 청춘을 연기하며 씻김굿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평범하지 않을까요. 톱스타들도 본인의 삶 속에서는 굉장히 평범하니까요. 연기를 하면서 내면에서 부딪혔던 거가 좀 더 사실화됨을 자각하는 순간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억지로가 아닌 느껴지는 대로 표현하게 되더라고요. 그런 스탠스를 계속 유지하고 싶죠.”

또 하나의 소망이 있다면 그동안 주조연을 많이 맡느라 악인, 미움 받는 캐릭터를 별반 해보질 못했다. 자신이 갖지 않은 성격을 시도해보고 싶은 욕심이다. 눈빛이 선해서 오히려 강렬한 빌런을 창조할 수 있는 게 장점이다. 올해 개봉한 영화 ‘치즈 인 더 트랩’에서 홍설(오연서)의 선배인 어둡고 폭력적인, 찌질한 루저 역으로 이 프로젝트의 시동을 걸었다.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한 시기에 만난 ‘명성황후’는 뮤지컬 배우 오종혁을 완전히 해체·재조립했다. 클래식 발성을 배워본 적이 없어 기피했던 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레슨을 받으며 팝, 록 창법뿐만 아니라 클래식 창법까지 연마할 수 있었다.

 

 

“전에는 대사톤과 노래톤이 똑같아서 극중 울면 목이 잠기고, 화가 나면 목이 갈라지곤 했어요. 그러다보니 감정 전달은 잘 됐으나 음정이 불안했죠. 이번에 이런 단점을 모두 해결했어요. 노래와 연기를 안정적으로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고요. ‘명성황후’가 나를 재정립시켜줬고 ‘무한동력’을 통해서 확실히 바뀌었어요.”

지난 10년, 휴가 한번 없이 줄달음질 쳐왔다. ‘무한동력’이 끝나면 자신에게 2개월간 휴가를 줄 예정이다. 걸어온 무대의 길을 돌아보고 체력충전을 위해서다.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이제야 배우를 향해 바투 다가선 것 같다”고. 배우이고 싶은 진지청년과의 인터뷰가 한여름 밤 꿈처럼 끝났다.

사진= DSP 미디어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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