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 심리묘사에 있어 섬세함을 놓치지 않은 채 정확하게 해내는 것으로 정평이 난 여배우 김희애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관부재판’ 실화를 다룬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로 오는 27일 관객과 마주한다. 1992년부터 6년간 일본정부를 상대로 무려 23회의 재판을 이끌어간 강단 있는 여장부 문정숙 단장 역을 맡아 연기변신을 시도했다. 삼청동 카페에서 이뤄진 인터뷰에서 김희애가 호출한 흥미로운 인물들 스토리를 정리했다.

 

 

01. 엑스트라 배우

‘허스토리’의 하이라이트는 후반부에 배치된 시모노세키 법정장면이다. 모든 배우들이 이 신을 위해 달려왔고 작품의 메시지를 응축한 지점이기 때문이다. 노배우들과 김희애의 빛나는 연기가 차례대로 등장하기에 놓치면 아까울 정도다.

“주조연 배우들은 자기 장면을 마치고나서 빠지면 되지만 엑스트라 배우들은 카메라가 돌아갈 때마다 배경으로 연기를 하잖아요. 어떤 영화나 드라마가 A급이냐, B급이냐는 결정짓는 건 그분들에게 달렸어요. 그들이 진짜로 연기하면 다큐처럼 생동감이 살아나요. 이번 법정신에서 일명 ‘일장기맨’들, 욕하고 진상 부리는 분들이 목이 다 쉴 정도로 연기하시는데 너무 감동스러웠어요. 주의 깊게 봐주셨으면 합니다. 훌륭한 배우가 되기 위해 성실함을 다하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제게 큰 자극이었어요.”

 

02. 김해숙 박정자 문숙 이용녀 예수정

‘허스토리’에는 김해숙 박정자 문숙 이용녀 예수정 등 장년 및 노년의 여배우들이 대거 등장한다. 김희애를 비롯해 김선영 이유영까지 가세하면서 세대를 아우르는 여배우 연기향연장이 됐다.

“어제 두 번째로 시사를 봤는데 선생님들이 각자 캐릭터에 맞게 연기하면서 내비치는 눈빛이 너무 순수했어요. 들어갔다가 나오는 게 배우의 삶인데 어마어마한 사건을 겪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삶을 재현해내야 하니 몸부림치셨을 거예요. 마음에 와 닿는 연기를 보여주신 듯해요. 그런 연기를 앞으로 보기 쉽지 않을 듯하고요. 그런 면에서 영화라는 게 관객에게 가장 손쉽고 저렴하게 카타르시스를 이루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는 가성비 높은 매체인 것 같아요. 저희들이 몇 달을 울고 애 닳았던 시간을 가장 가까이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03. 이순재 나문희

무식한 질문이지만 가장 궁금한 대목이기도 하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낯선 캐릭터와 밀착돼 빈틈없이 연기할 수 있느냐고. 용감하게 던졌다.

“수석 합격자들에게 공부 비결을 물을 때 ‘교과서에 집중했어요’라고 말하면 얄밉잖아요.(웃음) 뻔한 대답 같지만 대본을 열심히 보는 게 비결이에요. 백번이고 보다보면 그 안에 정답이 들어있어요. 작가가 취재한 것과 숙성시킨 고민의 결과물이 대본이니까요. 시간을 들여 정독하다보면 길이 보이게 되더라고요. 어떨 땐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내용이 낯설기도 하지만 상황과 대상을 이해하게 되면서 나를 변신시켜주죠.”

대본을 정독하고 숙지하는 것, 좋은 배우의 한 조건이다. 또 다른 필요충분조건은 무얼까. 그가 꼽는 이상적인 배우는 누구일까, 궁금함이 꼬리를 물었다.

“저는 배우도 생활인이라고 여겨요. 노말(normal) 라이프로 살아야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믿거든요. 그래서 연기하지 않을 때는 누구의 아내이자 엄마로 평범하게 살고자 노력하죠. 그래야 밸런스가 맞고요. 타고난 끼와 이를 유지하기 위한 성실함, 끊임없이 반성하고 주변이나 자연과 인간을 돌아볼 줄 알아야 성숙하고 매력적인 배우가 되는 것 같아요. 매일 파티나 하고 술 담배나 하면서 흥청망청 지낸다면...정신이 건강해야 육체가 건강하잖아요. 철저하게 건강관리하며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시는 이순재 나문희 선생님과 같은 모범답안이 있잖아요. 저희가 가야할 길이 선명히 보이는 거죠.”

 

 

04. 안판석 PD, 김수현·정성주 작가

20대의 빛나던 젊은 시절, 김희애는 어둡고 우울했다. 연기를 그만 두고 싶었고, 도망치고 싶었다. 일종의 우울증에 시달렸다. 감수성 예민한 여배우로서 사생활에 관심 많은 대중과 언론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때 배우 이외의 삶을 풍성하게 살았다면 안 그랬을 거예요. 취미생활을 하면서 자기 일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서 부럽고 참 현명하다고 여겨요. 저는 결혼과 출산, 아이 둘 키워놓고 컴백했을 때 밝아지고 활력 가득해져 있었어요. 다 마음먹기에 달린 것 같아요.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행복을 위해 웃으라’는 말처럼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요. 이렇게 천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행복하고 감사한 것임을 깨닫게 된 거죠. 뒤늦게 철이 든 거예요.”

복귀하면서 일을 더 프로페셔널하게 대하게 됐다. 꽃다운 여배우의 소모적인 부분이 아니라 진정한 인간의 얼굴을 연기할 수 있어 질리지 않고 삼나무처럼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더욱이 너무 좋은 사람들을 만났다. 오히려 나이 들어 그들을 만난 게 운이 좋았다고 여긴다. 작가 김수현·정성주, 안판석 PD가 그 주인공들이다. 특히 ‘아내의 자격’ ‘밀회’를 함께했고, 최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로 화제를 일으킨 안판석 PD에 대한 애착은 특별하다.

 

 

“여성의 편에서 봐주고, 여성을 위하는 PD예요. 가끔씩 ‘남자들이 답답하다’고 말씀하세요. 전 그게 약자의 편에서 봐주는 시선이라고 여겨요. 현장에서도 과도하거나 불필요한 촬영으로 배우들과 스태프를 힘들게 하지 않고 아주 편안하고 효율적으로 진행을 하세요. 그 감독님이랑 한번 하고 나면 눈이 높아져요. 이번에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도 잘 돼서 너무 기뻐요. ‘밀회’는 분명히 제 인생드라마인 거 같아요. ‘밀회’에서 진한 멜로는 해봤으니까 기회가 되면 감독님과 밝고 명랑한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05. 홍진영

인터뷰 말미에 의외의 인물이 대화에 등장했다. 신세대 트로트 가수이자 ‘인간 비타민’으로 불리는 홍진영이다. 지성과 관련한 이야기를 나누다 김희애의 입에서 불쑥 튀어나온 이름이다.

“저는 그 가수...홍진영씨 캐릭터가 귀엽고 너무 좋아요. 부럽고요. 과하다 싶은데도 그분을 보고 있노라면 마냥 기분이 좋아져요. (인터뷰 도중 홍진영이 박사학위 소유자라는 말을 듣자 ‘그렇다니까’라며 감탄한 뒤) 지적인 사람들은 자신감이 있어요. 전 자신감이 없어서 에너지 있게 해보려고 노력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사진= YG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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