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상반기 내내 "볼 만한 한국영화가 없다"는 소리가 많았다. 박스오피스를 살펴보면, 이런 투정이 근거 없는 말이 아니었음이 확인된다.

 

올 상반기 한국영화 최고 흥행작 '독전' 스틸컷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는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1115만7406명)가 천만관객을 돌파했고 ‘블랙팬서’(539만9070명), ‘쥬리기 월드: 폴른 킹덤’(490만0698명), ‘데드풀2’(367만9663명), ‘코코’(351만40명) 등 5편이 350만 허들을 훌쩍 넘었지만 한국영화는 6월21일 기준 범죄액션 영화 ‘독전’(487만78716명) 한 편에 불과하다. 범죄코미디 영화 ‘탐정 리턴즈’(130만4059명)가 있으나 극장가 ‘공룡 파워’에 발목 잡혀 기대치를 밑돌고 있다.

반면 상반기 안방극장은 시청률, 화제성, 작품성 면에서 풍성했다. 잊혀져가던 좋은 배우의 능력을 재발견해내고, 잠재력 있는 신인을 스타로 탄생시키고, 다양한 소재를 바탕으로 팍팍한 현실을 직시하거나 잠시라도 잊고지낼 만한 세대별 공감작들을 속속 내놓았다. 여성들의 이야기 그리고 다채로운 직업군 발굴도 두드러졌다. 

 

 

지상파 방송사 미니시리즈로는 ‘우리가 만난 기적’(KBS2)이 13.1% 시청률로 정점을 찍었다. 평범한 가장(김명민)이 이름과 나이만 같을 뿐 정반대의 삶을 살아온 남자(김명민)의 인생을 대신 살게 되면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변화시키는 과정을 담은 ‘영혼 체인지’를 소재로 한 휴먼드라마다. 판타지에 로맨스, 교훈, 반전 등 갖가지 즐길 거리를 접목해 어른들의 초점에 맞춘 동화같은 이야기로 시청자의 이목을 끄는데 성공했다.

종편과 케이블TV 돌풍은 지상파를 압도하는 수준으로 거셌다. JTBC ‘미스티’(8.5%), ‘품위 있는 그녀’(12.1%)가 위력을 발휘했다. 성인 취향의 미스터리 치정멜로에 각각 김남주, 김선아 김희선과 같은 걸출한 40대 여배우를 전면에 내세웠다. 전통적으로 시청률이 높은 지상파 일일극·주말극이 아닌 미니시리즈의 경우 10%가 넘으면 ‘대박’에 속하는 현실에서 종편·케이블TV에서 이 정도의 시청률이 나온 것은 ‘역대급’이다.

뒤를 이어 멜로물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가 등장했다. 최고 시청률은 8.3%였으며 화제성 조사회사인 굿데이터코퍼레이션 집계 결과 올 상반기 가장 화제가 된 드라마로 자리매김했다. 30대 연상연하 커플의 현실적인 연애담, 자존감이 약했던 여성의 성장기를 그린 이 작품은 김은 작가, 안판석 PD, '멜로퀸' 손예진과 '국민 연하남' 정해인의 고감도 대본·연출·연기 그리고 감성적인 OST로 방영 당시 연일 화제를 지폈다.

 

'밥누나'를 통해 '멜로퀸' 명성을 재확인한 여배우 손예진과 라이징 스타 탄생을 알린 정해인

요즘엔 월화드라마 ‘미스 함무라비’ 반향이 뜨겁다. 식상할 법한 법정물의 내용을 정경유착의 권력형 비리가 아닌 일상의 사건사고들, 법원에서 일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으로 채우며 공감대와 신선함을 포획하고 있다.

타 종편·케이블채널의 기세도 만만치 않았다. tvN의 경우 제1회 칸국제시리즈 페스티벌에 진출한 이보영 주연의 월화드라마 ‘마더’는 웰메이드 호평을 받았고, 사건 위주의 경찰 드라마가 아닌 사람을 중심으로 한 스토리 전개로 인간미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킨 노희경 작가의 주말드라마 ‘라이브’는 최종회 7.7% 시청률을 사냥했다. 수목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인간의 성장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가운데 이선균 아이유의 연기가 보석처럼 빛났다. 시청률 7.4%, 상반기 드라마 화제성 2위의 영예를 품었다.

 

경찰드라마의 외피에 함몰되지 않은 채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관철시킨 노희경 작가의 '라이브'

‘장르물 명가’ OCN은 장르물 안에서도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다. 디테일이 돋보이는 대본과 현실감 높은 소재로 시청자를 사로잡은 ‘작은 신의 아이들’, 개성 강한 네 여주인공의 얽히고설킨 이야기로 극을 풍성하게 만든 ‘미스트리스’ 등이 호평 속에 막을 내렸다.

영화와 드라마를 단순 비교하기엔 영역이 매우 다르다. 유·무료, 수용자, 러닝타임, 관람형태 및 유통 방식의 차이 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튜브, 넷플릭스 등 다양한 플랫폼을 기반으로 한 콘텐츠가 대거 늘어나며 시청(관람) 패턴이 급변했고, 경쟁으로 인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점은 동일하다.

과거 지상파 방송사의 주 시청층이 40~50대 중장년층이었다면 요즘은 채널과 프로그램이 많아지며 타깃이 세분화되면서 20대로 낮아졌다. 방송계는 이들이 선호하는 장르물, 웰메이드 작품들을 속속 만들어내며 환경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 스태프를 고용해 반사전제작 시스템으로 ‘영화적 감성’ ‘퀄러티’를 드라마에 채우며 높아진 시청자 눈높이를 맞춘다.

 

'꽃띠 여배우'가 아니더라도 관록과 성숙함으로 작품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음을 품격있게 웅변한 '품위 있는 그녀'의 김선아 김희선

드라마 제작진은 소위 티켓파워를 갖지 못했다는 이유로 영화 캐스팅에서 배제됐던 연기내공 뛰어난 여배우들, 주목할 만한 신인들, 중장년 연기자를 꽂아 넣어 최대한 활용한다. 영화의 주 종목이었던 장르물을 완성도 높게 내놓는가 하면 흥행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스크린에선 씨가 말라버리다시피 한 멜로, 로맨틱 코미디를 시청률 불패신화로 가동시킨다.

‘바보상자’ ‘막장극’ ‘쪽대본’ 오명을 뒤집어썼던 드라마가 급격한 생태계 변화 속에서 이렇게 달라진 사이 ‘예술’이자 ‘산업’으로 추앙받던 영화는 잔뜩 위축된 모습이다. 막대한 물량 공세를 펴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치이고, 트렌디하게 다양한 시도를 하면서 유의미한 결과물을 캐내는 국내 드라마에 받힌 양상이다. 올드패션 흥행코드를 놓지 못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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