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이기 전에 이런 일을 겪었다는 거에 한 인간으로서 아팠다. 힘든 일이 있으면 좋은 일이 다가오고, 산과 강을 건너면 평지가 나오고, 절망 끝에 희망이 온다는데 이분들은 그런 게 없는 느낌이었다. 상상할 수 없는 아픔을 겪으며 살아오신 분들을 표현한다는 것마저도 죄송했다. 내 인생을 되돌아보게 해준 작품이다.”

 

 

‘허스토리’(감독 민규동)는 1992년부터 98년까지 6년 동안 일본 정부에 당당히 맞선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그들을 위해 함께 싸웠던 사람들의 뜨거운 기록이다. 당시 일부 유죄 판결을 이끌어냄으로써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놨던 ‘관부재판’ 실화를 소재로 했다.

연기인생 44년째인 김해숙(63)은 관부재판 지원단장 문정숙(김희애)의 설득 끝에 과거의 아픔을 딛고 자신의 상처를 공개한 뒤 일본에 당당히 맞서는 배정길 역을 맡아 김희애와 함께 극을 이끈다.

여름 극장가 대작 틈바구니에 위태롭게 서 있는 ‘허스토리’는 현재에까지 깊은 음영을 드리운 역사적 아픔을 다룬 묵직한 주제의식, 뚜렷한 캐릭터들 그리고 이를 연기한 배우들의 수연으로 인해 감동과 재미를 안겨준다. 젊은 이유영부터 중간인 김선영 김희애, 장년의 김해숙 예수정 문숙 이용녀 등 세대별 여배우들의 개성과 내공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쁨이 무엇보다 크다.

 

 

“문숙 예수정 이용녀 배우처럼 뜨거운 열정 가진 분들과 한 공간에서 호흡을 나눴다는 게 의미가 깊다. (김)희애와는 젊었을 때부터 봐왔다. 같이 늙어가는 사이고(웃음)...드라마에서 두 번 공연한 뒤 오랜만에 만났는데 옛정이 남아 있어서 전혀 걱정이 없었다. 워낙 연기 잘하는 배우이지 않나. 전에는 주로 우아하고 예쁜 역할에 여배우 향이 짙었다면 이번에 처음으로 거친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훌륭하게 해냈다.”

영화의 거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법정장면이 가장 힘들었고 지금도 최애 장면이다. 배정길의 끔찍했던 과거, 파란만장한 인생,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야 하는 하이라이트였다. 무엇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과거 아픔뿐만 아니라 현재의 모습 그리고 ‘허스토리’의 메시지인 우리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앞으로도 손잡고 나아갈 것임을 웅변해야 해서다.

“기도했다. 연기를 잘하게 해달라고가 아니라 이분 심정이 조금이라도 돼서 이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배정길 할머니처럼 당당했으면 했고 이야기를 정확하게 전달하고 싶었다. 감정을 절제하고 절로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는 게 가장 고통스러웠다. 김해숙의 감정을 덜어내기 위한 싸움이 촬영 내내 이뤄졌다. 김수희의 ‘멍에’ 가사가 이해됐다. 가슴에 멍이 드는 게 이런 느낌이겠구나.”

 

 

중견 여배우 가운데 김해숙처럼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많은 작품을 왕성하게 찍어나가는 이도 드물다. 나이듦에도 현장을 굳건히 지키고 있음은 행운이자 미덕이다. 본인 역시 만족해 하지만 한편으론 지독한 고민거리다.

“너무나 많은 작품을 해서 식상해 보일 수 있다. 장소, 환경, 내용은 다르지만 내 모습은 비슷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 그런 것과 항상 싸웠다. 그래서 경력이 쌓이고 해가 갈수록 작품이 더 두렵다. 전과 비슷한 모습이나 연기가 보이지 않을까 싶어서 외모부터 디테일한 부분까지 치열하게 고민한다. 어떤 사람들은 ‘많이 나와서 지겹다’는 소리도 한다. 그런데 난 연기를 사랑하고, 역할을 대리로 보여주는 숙명을 지닌 사람이다. 관객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

무수히 많은 대표작을 거느리고 있으나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인캐(인생캐릭터)는 확고하다. 칸 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던 박찬욱 감독의 ‘박쥐’ 속 태주(김옥빈)의 시어머니인 싸늘하고 무표정한 라여사와 최동훈 감독의 천만영화 ‘도둑들’의 범죄자 씹던껌이다.

“두 감독은 여배우임을 잊고 살았던 나를 여배우로 만들어준 고마운 이들이다. ‘박쥐’의 라여사는 스크린에서 배우 김해숙의 생명력을 되살려준 잊지 못할 영화다. ‘도둑들’의 씹던껌은 그 나이에 홍콩배우 임달화와 멜로도 하지 않았나.”

 

 

수많은 작품에서 엄마의 얼굴로, 주인공이거나 조연으로 관객과 눈을 맞춰왔다. ‘암살’ ‘터널’ ‘신과함께- 죄와벌’처럼 잠깐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특별출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무엇이 그를 굿판 위 신들린 무당처럼, 불을 향해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경계나 망설임 없는 행동을 하게 했을까.

“모정은 사람을 용감하고 위대하게 만든다. 이 세상 모든 것을 품고 있는 가장 어려운 연기이면서 실생활에서도 엄마 역할이 가장 어렵다. ‘엄마’라는 두 글자를 다양하게 연기해야 하는 배우여야 하고 난 그 일을 사랑한다. 주조연을 떠나서 난 영화를 사랑한다. 나의 다양한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를 항상 원했기에 특별출연이어도 꺼릴 이유가 없었다. 영화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이미지 관리 따윈 중요하지 않다. 나를 깨고 싶을 따름이다. 주디 덴치나 메릴 스트립 등은 여러 캐릭터를 모범적으로 해나가고 있지 않나.”

데뷔 무렵, 연기에 눈을 떠가던 시절 그리고 경력 4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떤다. 새까만 후배 연기자들이 “선생님도 떠세요?”란 말에 속으로 “난 떨면 안되는 건가”라고 되뇐다.

“내가 어떤 역할을 맡아서 작품을 하는데 어떻게 떨지 않고, 긴장 안하면서 할 수 있을까. 아직도 떨린다. 내가 살아보지 않은 인생을 상상해서 연기로 표현해야 하는데 어떻게 겸손하지 않을 수 있고, 떨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누군가의 삶을 연기로 보여주는 거니까.”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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