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5 : 길상사

골목의 내리막길 끝에서 골목을 가로질러 끊어버리는 차도가 나온다. 드문드문 차들이 지나가기는 하지만 대체로 조용하다. 그 모습이 숲 속의 조용한 강을 보는 것 같다. 강을 따라 강가를 걷듯이 차도를 따라 걷는다. 조용한 강가를 걷다 보니 절이 하나 나온다. 오묘한 봉투산책의 종착지인 길상사다.

길상사에 들어가 작은 통나무 의자에 자리를 잡고 둘러앉는다. 7시 타종을 기다린다. 곧 스님이 나와 종을 때린다. 생각보다 종을 치는 횟수가 많았고 오랜 시간 동안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들 종소리를 들으며 침묵을 지킨다. 타종을 기점으로 분위기가 변했다.

고요해진 시간. 차분해진 분위기. 그 차분함으로 자신이 끌리는 문장을 골라 읊는다. 각자가 선택한 문장들이 시가 되어 서로에게 자신들의 느낌을 전달한다. 그 여운을 느끼며 앉아있다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작은 시냇물 위 작은 다리 가운데 서서 다시 문장을 읊는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 상상을 더한다. 시냇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물소리. 나는 샤워를 생각한다. 욕실과 그 편안함을 생각한다.

나는 비 내리던 날을 추억한다. 우산에 빗방울 떨어지던 모습과 소리. 나는 섬을 상상한다. 육지에서 몇 백 킬로미터 거리 바다 한가운데에 동떨어진 섬. 그러면서 성북동과 길상사 자체도 서울 대도시 어딘가에 숨어있는 조용한 섬이 된다.

 

길상사 내부를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새 절 내부엔 어둠을 밝힐 조명이 켜지고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산책을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다시 둘러앉아 오늘의 산책을 독특하게 기념하고 기억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산책 동안 수행한 과제를 확인한다. 각자가 한 명씩 관찰하고 그 사람에게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골라준 단어들 알려주기. 처음 만난 사람이 오늘 내 모습만을 보고 어떤 단어들을 나에게 선물해줬을지 궁금했다. 마치 학창시절 롤링페이퍼 할 때 종이가 나에게 다시 되돌아오기 직전처럼.

종이배, 클로버, 호밀빵, 풀밭, 놀이동산, 주사위, 만화책, 담백한, 생수, 박하, 새우튀김 등. 다른 사람이 느낀, 나와 어울리는 단어들이다. 평소에도 들어왔던 이미지의 단어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거리기도 하고, 반면에 약간 의외인 단어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 단어들은 누군가가 날 천천히 관찰하고 찾아낸 내 모습이었다. 공감을 하기도 하고 내 새로운 모습을 생각하기도 하며 종이 위의 그 단어들을 하나하나 오랫동안 살펴봤다.

 

Bonus Part : 종로곱창

길상사에서 나와 깜깜한 길을 내려간다. 손목시계의 시침은 벌써 숫자 9를 넘어 더 높은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예상보다 늦게까지 걸었고 그렇기 때문에 배가 고픈 건 당연했다. 비록 정신적인 것은 채웠을지라도 육체를 굶길 수는 없었다. 때마침 누군가가 다같이 저녁식사를 하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곧바로 메뉴를 의논하며 걷기 시작했다.

결국 산책멤버 중 성북동에 사는 사람의 추천으로 가게 된 종로곱창. 한성대입구역 주변에서는 유명한 식당인지 일요일 늦은 시간에도 손님이 많았다. 그리하여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곱창볶음으로 오늘의 산책모임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아무리 먹어도 없어지지 않는 어마어마한 양 덕분에 천천히 배부르게 먹을 수 있었다. 좋은 선택이었다.

누군가와 식사를 같이 한다는 것 또한 산책만큼이나 편한 마음으로 천천히 서로를 알아가는 좋은 방법이다. 산책 후 곱창을 먹으며 그제서야 각자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어떤 꿈을 가진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산책 동안 나누지 않았던 것들이었지만, 그것들 또한 사회라는 곳에서 사람들과 관계를 만들고 살아가는 나의 정체성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였다. 또한 타인의 일과 꿈에 대해 듣고 나의 일과 꿈을 말하며 지금 내 모습을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되었다. 낯선 만남에 약간은 긴장되며 어색하지만 오묘한 재미가 있는 산책은 그렇게 마무리 되었다.

 

Epilogue

지금 보이고 느끼는 것 이상으로 미리 추측하지 않고 누군가를 천천히 알아간다는 것이 쉽지는 않다. 같은 길을 걸으며 이 사람이 어떤 사물에 관심을 가지는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상황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아갈 기회가 많지 않고 그럴 여유도 없으니까. 그래서 우리는 단편적인 단서만을 가지고 쉽고 빠르게 사람을 판단한다. 판단 결과, 내게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고 느끼면 빠르게 관심을 끊어버린다. 그때부터는 이 사람이 열린 마음으로 미소를 지어도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우리의 일반적인 인간관계는 그렇게 흐르기 쉽다. 그리고 그 판단결과로 너와 나의 우열을 가리려 한다. 어릴 때부터 우열을 가리는 것에 익숙하니까. 급을 나누고 승자와 패자를 구분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우리 삶이 달리기 시합에 비유되곤 한다. 그러나 난 이 비유와, 이 비유를 당연하게 사용하는 사회의 패러다임을 좋아하지 않는다.

대신, 난 우리 삶을 산책에 비유하고 싶다. 여유와 상상력을 가지고 주변의 사람들과 나를 천천히 살펴보며 발맞춰 함께 걷는 산책. 이 사람은 웃을 때 보조개가 예쁘구나, 이 사람은 쑥스러울 때 귀가 단풍잎같이 빨개지는구나 같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 산책. 그런 산책을 하며 살고 싶다.

 

* 오묘한 봉투산책

매달 넷째 주 일요일 5시

신청방법: 카카오톡 @느낌가게 혹은 027658349

오묘한 산책 재료 15000원

인스타그램 omyo_han

 

출처= http://magazinewoom.com/?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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