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종영한 MBC 주말극 ‘이별이 떠났다’는 50대 중년여성 영희(채시라)과 20대 여대생 정효(조보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결혼과 출산, 일과 자존감 등 여성들이 직면한 문제를 밀도 높게 풀어냈다. 중년 여성 작가일 거라 예상했으나 서른 네 살의 남성작가 소재원이다. 소설가인 그는 영화 ‘비스티 보이즈’ ‘소원’ ‘터널’의 원작자이기도 하다. 첫 드라마 집필에서 성공적인 시청률과 호평을 얻은 그를 성북동의 호젓한 집필 공간에서 만났다. 180cm가 넘는 키에 다부진 체격, 훈훈한 마스크의 작가가 손을 내밀었다.

 

 

“고부관계를 떠나서 나이 많은 여자가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이해하는 게 먼저 아닐까요. 자신도 며느리였으니까 며느리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고요. 아이러니하게 학대가 대물림되면서 고부간 갈등의 골이 심화되는 경우가 있었는데 여자가 여자를 적으로 두는 상황에 대한 해결방안을 제시하고 싶었죠. 주인공 영희가 며느리에 대한 동질감,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끼면서 서로의 이해관계를 넓혀가는 모습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웹소설로 먼저 공개돼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별이 떠났다’는 아내의 임신이 모티프가 돼 탄생했다. 새 생명을 위해 직장생활을 접고 입덧으로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며느리 그리고 여자의 고통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포개졌다.

“제 작품에는 늘 저의 아버지가 등장해요. 어린 시절 가족을 떠난 어머니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지금도 홀로 집을 지키고 계세요. 이런 모습을 서영에게 대입시켰어요. 딸 바보인 수철(정웅인)도 아버지와 많이 닮아 있고요.”

아버지는 장애인에 빚더미에 앉아 있었다. 공동 화장실이 있는 단칸방에서 온 가족이 지냈고, 빚쟁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으나 자식을 포기하지 않았고, 자식의 꿈을 위해 애를 썼다. 기억해 보면 뭘 하려 할 때 반대한 적이 없고, 단 한 번도 매를 들었던 적이 없었다. 늘 ‘사랑한다’는 말을 해줬고, 아침마다 마사지를 해주면서 ‘오늘도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채시라 조보아 주연의 드라마 '이별이 떠났다'/사진=MBC 제공

“아버지의 인생을 배우는 게 즐겁고 행복해요. 가난하다고 사랑이나 행복이 없는 건 아니더라고요. 가장 낮은 곳에서 행복을 느꼈던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어려운 상황에서도 만족하는 방법을 터득했죠. 유년기에 겪었던 지독한 가난이 오히려 창작의 큰 모티브가 됐고, 긍정적인 사고를 탑재하게 된 원동력이에요.”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큰 키 덕분에 중학생 때 아버지의 권유로 배구를 시작했다. 먹고 살 길을 찾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하지만 운동화도 못 살 형편이라 부원들의 놀림에 못 견뎌 배구부에서 탈퇴했다. 일진들에게 맞으면서 싸움 실력을 키워갔다. 아버지의 장애를 놀리는 아이들을 향해 주먹을 날리는 등 방황의 나날을 보냈다. 아버지는 파출소에 끌려가 있는 아들을 늘 데리러 와서는 책망하기보다 “밥은 먹었냐”고 묻고는 3500원짜리 국밥을 사주셨다. 아버지의 걱정이 가슴에 꽂히며 그제야 방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20대 초반에 판사님이 제 사건기록을 보고 사회봉사 명령을 내리신 적이 있었어요. 한샘병 환우 어르신들이 있는 곳에 보내면서 ‘당신이 느끼는 게 분명 있을 거다’라고 말씀하셨죠. 제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됐죠. 저보다 훨씬 불우하게 사시는 분들이 환하게 웃으시더라고요. ‘뭐가 좋으셔서 웃으시냐’고 물었더니 ‘살아있는 게 즐겁다’고 하시는 거예요. 과거엔 동네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때려죽이기도 했었는데 이젠 발 뻗고 잘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거죠. ‘나의 불만은 무엇이었나’란 날 선 질문이 솟구치더라고요.”

작가 소재원의 스승은 낮은 곳에서 행복을 체화했던 아버지와 한샘병 환우들이었다.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경치를 아름답게 볼 수는 있으나 고통의 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아래에서는 그게 가능했다. 그의 창작활동은 이렇게 태동했다.

 

 

2008년 호스트바 경험을 토대로 집필한 소설 ‘나는 텐프로였다’로 등단한 이후 12권을 펴내며 소외된 약자를 대변하는 젊은 작가로 인정받았다. 다방면에 호기심이 많아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도 참여했으며 더불어민주당 윤리심판원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젠 드라마 작가로도 데뷔한 셈이다.

“소설은 문장으로 모든 걸 설명하고 이끌어가야 하는 부담이 있어도 혼자 하는 편안함이 있어요. 나 하나만 신뢰하면 되는데 드라마는 글을 통해 배우, PD, 스태프 등 수많은 사람을 움직여야 하고, 신뢰를 주고받는 게 어려웠어요.”

자신이 창조해낸 소설 이상의 감정을 배우들이 절대 흉내낼 수 없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작업하면서 채시라, 양희경, 조보아 등 배우들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의 감정을 보여줘서 놀라웠다.

“이분들은 내가 글로 표현한 걸 자신의 경험으로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더라고요. 많이 배웠죠. 초반 대본엔 지문이 굉장히 많았는데 첫 방 이후 각성하면서 지문을 많이 줄였어요. 오히려 배우들에게 방해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요. 특히 채시라 배우는 출산관련 장면 대본을 보자마자 전화를 걸어와 현실적인 조언과 제안을 해주셔서 고스란히 반영했고요.”

채시라는 소작가가 제작사에 먼저 캐스팅 제안을 했다. 처음 만났을 때 걸어오는 순간부터 영희가 보였다. 조보아의 경우 잘 몰랐던 상태라 연기에 대한 기대를 많이 안했는데 리딩 때 깜짝 놀랐다. 대본을 속속들이 파악한 채 왔기 때문이다. 분량을 늘려 영희와 비등하게 끌고 갔다.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직장인처럼 작업한다.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러 외출했다가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오면 함께 산책 나가고, 놀이터에 들렀다가 저녁을 먹이고 잘 때까지 놀아준다. 그리곤 오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집필한다. ‘열일’ 모드다. 방송사 편성 전인 차기 드라마는 2부까지 탈고했다. 이전에 발표한 소설 ‘균’은 영화화 작업 중이다. 사회적 편견과 부부관계를 다룬 소설도 집필 중이다.

“공지영 황석영 신경숙 소설가의 글 스타일이 굉장히 다른데 전 이분들의 특징을 접목하는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많이 훈련했어요. 드라마 작가로는 김은숙 노희경 님을 좋아해요. 그분들도 각자 확연히 다른 색을 가지고 있으나 흡입력 있는 글을 쓰고 계시잖아요. 전 그분들의 특징을 섞은 글을 쓰고 싶어요. 작가는 유연해야 된다고 생각하고, 대중적인 글을 써야한다는 게 제 철칙이에요. 눈에 그려지는 글이 가장 좋다고 여겨서 그런 경향을 추구해요.”

작가로서 자신의 장점을 ‘공감대 능력’으로 꼽는다. 자신이 생각하는 게 대중과 다르지 않아서다. 소위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았고, 부자로 살아보기는커녕 평범 이하의 삶을 살았다. 단 한번도 위에 있어보질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관심사가 대중의 생각과 접점을 만들었던 거 같다고 자체 평가한다.

사진= PF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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