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알렉사 청이나 국내 김원중처럼 모델 출신의 디자이너 혹은 겸업하는 멀티 플레이어는 꽤 많으나 패션 디자이너로 활약하다 신체조건과 이미지, 런웨이에서의 표현력이 관건인 모델로 터닝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윤다로(26)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패션업계의 라이징 스타 모델이다.
190cm에 육박하는 남성모델들이 즐비한 ‘업계’에서 180cm를 살짝 넘는 그의 키는 ‘단신’에 속한다. 하지만 덜렁덜렁 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에선 단점이 전혀 느껴지질 않는다. 비주얼도 예사롭지 않다. 민머리 혹은 짧은 머리가 대세인 이곳의 트렌드와 달리 고교시절부터 길러왔다는 등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나풀거린다.
또한 해외 톱모델 안드레 패직이나 에리카 린더처럼 젠더의 경계를 허무는 중성적 이미지에 강렬한 카리스마를 탑재했다. 무엇보다 현역 디자이너답게 옷에 대한 이해와 표현력이 탁월하다. 송지오, 장광효 등 내로라하는 남성복 디자이너들이 올해 모델 데뷔한 ‘초짜’를 연이어 자신의 쇼에 호출하는 이유다. 빈티지 제화숍과 카페가 줄지어 늘어선 성수동의 스튜디오에서 윤다로를 만났다.
지난 3월 2018 F/W 헤라서울패션위크로 첫 공식 캣워킹을 했다. 카루소, 송지오옴므, 스티브제이앤요니피, 한철리, 리시엔느, 디엔티도트쇼에서 기존 남자모델들에게서 보지 못한 몽환적 이미지와 카리스마로 패션피플의 시선을 장악했다.
“어렸을 때부터 꾸미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생 때는 연기를 하고 싶었는데 집안의 반대로 접었고, 고교 2학년 무렵 진로를 결정하던 시기, 내가 뭘 좋아하나 생각을 많이 했어요. 옷 입는 걸 좋아하더라고요. 패션 쪽으로 진학하자고 결정했더니 부모님도 이곳저곳을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대학 패션디자인과에 진학했어요.”
졸업 후 디자인실에서 일을 했고,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려다 불발되기도 했다. 이후 이명순 웨딩드레스에서 재단을 하던 중 지난해 1월부터 모델 제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옷을 어떻게 하면 대중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다. 작은 패션 브랜드들의 룩북 촬영 제안에 한 두 차례 참여하다보니 계속 기회가 주어져 독하게 체중을 감량한 뒤 모델 매니지먼트사로 구직활동을 펼쳐 본격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그렇다고 디자이너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3개월 전에 디자이너·모델·포토그래퍼 4명이 모인 디자인 크루 ORC(Our Real Clothes)를 결성해 디자인 플레잉을 해오고 있다.
“옷으로 놀자고 만든 크루에서 전 디자인이랑 패턴을 맡고 있어요. 각자 재밌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이것저것 만들어서 SNS에 올리고 있는데 사람들이 흥미로운 반응을 보이더라고요. 저희가 제작한 PVC 소재 트러커와 파우치는 유럽 패션계정인 하이노비스티에 소개되기도 했고요. 나중에 브랜드화해서 세일즈도 해보려고 구상 중이에요.”
디자이너로 일할 때는 자신의 옷이 노출될 기회가 적었는데 모델링을 하다 보니 자신을 많이 알아봐주면서 덩달아 윤다로표 의상 노출도 많아지고 있어 고무적이다. 단점은 2가지 일을 하기에 시간을 쪼개는 게 다소 버겁긴 하지만 즐거운 일로 받아들인다.
“디자이너로 백 스테이지에 있을 때는 40여 명의 모델을 서너멍이 챙겨야 해서 너무 정신 없고 힘들었다면 모델로 백 스테이지에 서면 긴장은 되지만 내 몸만 챙기면 되니까 편하고 재미나요. 무엇보다 옷을 입을 때 디자이너의 철학이라든가 디테일이 눈에 많이 들어와요, ‘이건 어떻게 만들었나’ 살펴보게 되고...그래서 모델일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죠. 나만의 표현법이라고 한다면 여성적인 옷을 입었을 때는 조신하게, 남성적인 수트를 입었을 때는 묵직하게 표현하고 캐주얼한 옷일 때는 평소 스타일을 살려서 워킹하고 터닝해요.”
그가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는 포스트모더니즘 대표주자인 일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그리고 구조적인 디자인과 해체주의로 유명한 벨기에의 앤 드뮐미스터다. 윤다로 역시 아방가르드한 디자인을 추구한다.
“최근 디자인 방향성을 잃었는데 다시금 예전에 좋아했던 요지 야마모토 스타일을 깊게 파고드는 중이에요. 해체주의 아카이브를 많이 찾아서 참고하고 있어요. 야마모토는 루즈하고 펄럭펄럭한 실루엣이 매력적이에요. 강한 레드컬러를 사용해도 그만의 특징으로 묻혀내죠. 워낙 영감을 많이 얻는 디자이너라 기회가 된다면 꼭 요지 야마모토 쇼에 모델로 서고 싶은 게 꿈이에요.”
섹시한 개구쟁이 매력을 지닌 미국 모델 콜 모어, 남성임에도 치명적인 여성미로 란제리 모델까지 섭렵한 호주 출신 모델 안드레 패직, 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해외 런웨이를 활보하고 있는 김수민은 그에게 늘 도전의식을 자극하는 모델들이다.
“원래는 검은색 옷만 입었고, 작품 역시 블랙 위주에 톤다운된 카키색이나 무채색 등 무거운 컬러를 많이 작용하는데 요즘은 컬러감 있는 옷을 입으려고 해요. ORC를 하면서 좀 더 포괄적이고 재미난 옷을 많이 만들려 하는 것 같아요. 트렌드에 맞아 떨어지는 수트, 트러커, 패딩재킷 등을 디자인하고 있고요. 평소 제가 입는 옷이나 액세서리는 직접 만들어요. 오늘도 니트 상의를 빼고 팬츠와 가방은 제가 제작한 거예요.(웃음)”
그는 소망한다. 자신의 철학과 소신을 가지고 디자인을 꾸준히 하는 것. 자기 개성을 찾아 발전시키면서 장기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모델이 되는 것을.
“사는 동네가 신도시인데 새벽에 일어나 산책하거나 텅 빈 공원에서 그네 타는 걸 좋아해요. 실용적이지 못한 디자인, 불편한 디자인을 어떻게 편하고 멋있게 만들까란 숙제를 풀기 위해 미술관 전시회에 들러서 작품을 보며 많은 것들을 깨우치기도 하고요. 일상에서 디자인 영감을 많이 얻는 것 같아요.”
최근 태연과 멜로망스의 콜라보 곡 ‘Page 0’ 뮤직비디오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해 화제를 모은 윤다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배우든 뭐든 가리지 않고 도전해볼 것이라고 ‘야망’을 툭 꺼내놓는다.
사진= 허승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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