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이 개봉 4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음악영화 ‘보헤미안 랩소디’가 광풍을 일으키고 있는 연말 극장가에서 선전을 펼치는 중이다.

경술국치일 이후 최대의 치욕스러운 날로 기억된 1997년 IFM 사태를 다룬 영화는 20년이 흐른 현재, 중장년 세대와 젊은 관객 모두에게 각기 다른 울림을 던지고 있다. 보석처럼 빛나는 영화의 한 축을 배우들이 맡았다. 이 가운데 엄청난 경제위기가 닥칠 것을 예견한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아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고 나가는 김혜수의 내공은 놀라울 정도다. 절제된 가운데 단단함이 느껴지는 정의로운 모습은 어느 새 국가부도의 벼랑 끝에 선 관객의 긴장과 분노에 한 줄기 빛을 선물한다.

 

Scene 1. IMF 1주일간의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흥미롭겠다 싶었다. 얼마나 드라마틱할까. 막상 시나리오 읽다보니 재밌었는데 일번적인 재미와 달랐다. 출연을 한다 안한다보다 이 영화는 꼭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정말 잘 만들어졌으면 좋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출연을 결정하고 난 뒤 제작자·감독님을 만나서 ”우리 잘 만들자“고 했다.

Scene 2. 시나리오를 읽을 때 한시현은 정말 주인공 같았다. 위기를 막아보려 고군분투하는 한시현의 전형성이 확 와닿았다. 배우로선 이런 캐릭터에 큰 매력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도 인간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여지가 있었다. 원칙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다. ”위기에 맞서 투사처럼 싸운다“는 표현도 하시는데 투사나 전사를 떠올리지 않았다. 본분에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사람, 소임을 다하는 인물로 받아들였다. 그러기에 위기에 봉착했을 때 신념대로 움직이다보니 다른 관료·정치인들과 부딪히는 것이었을 테다.

Scene 3. 싱글여성 한시현과 김혜수는 전반적으로 비슷하다 할 수 있다. 사사로운 가정사를 내밀하게 케어하지 못하면서 자신의 일에 충실하고 스스로에게 ‘올인’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일관성과 뚝심과 비교했을 때 난 많이 떨어진다. 한시현보다 훨씬 약하다. 실제 당시 금융조직 실무진에 여성 고위급 인사가 없었다고 한다. 보수적인 당시 상황에서 여자가 통화실무를 담당하는 건 정말 실력으로 인정받아서이지 않겠다. 한국은행 총재마저도 위기상황이 닥쳤을 때 한시현에게 물어볼 정도였으니. 강박이 있을 정도로 철두철미해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제대로 해낸 여자’란 느낌을 갖고 연기에 임했다.

Scene 4. 한시현은 국가부도 위기의 전모에 대해 상세히 알았고, 위기를 끝까지 막아보려 했지만 좌절한 뒤 사표를 던지고 협상기록을 작성한 뒤 조직을 떠난다. 고군분투하고 자신의 무기력함을 절감한다. 막바지에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슬픔의 눈물이라기보다 훨씬 복잡한 감정일 것이다. 그런 시현 앞에 IMF로 직격탄을 맞은 오빠가 등장한다. 이 때 한시현이 느끼는 고통이라는 건 자멸감에 가까운 좌절이었을 거다. 스스로가 아등바등했던 것도 오빠, 노동자, 중소기업 사장, 서민을 지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날 지키려다보니 정작 가족의 위기도 모른 채 지냈던 게 아닌가. 그 순간 많은 것들이 무너지면서 체감했을 것 같다.

 

Scene 5. 나도 IMF를 겪었고, 주변에 직간접적으로 피해 본 분들도 많았다. 그런데 그동안 잊고 지냈다. 영화작업에 들어가면서 내가 이렇게까지 몰랐나란 생각과 동시에 ‘아! 어떻게 보면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을수 있겠구나’란 깨달음이 동시에 들었다. 나도 이번 영화를 통해 알게 된 게 많다. 당시 IMF를 야기했던 잠재적 문제들과 지금 당면한 문제들은 출발은 다를 테지만. ‘국가부도의 위기’에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이런 것들이 있었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져주는 유효한 메시지가 분명 있다. 영화라는 매개체로 우리의 경험과 생각을 나눌 수 있는 작품은 되지 않을까.

Scene 6. IMF 총재(뱅상 카셀)가 비밀리에 입국해 협상팀과 회의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영어로 협상 조건의 부당함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장면을 위해 준비할 시간을 많이 가졌다. 중요한 장면인데다 영어대사에 까다로운 경제용어가 많았기 때문이다. 말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대신 부담은 없애야 감정을 제대로 실을 수 있기에 배리에이션을 많이 했다. 뱅상 카셀은 완전 웰컴이었다. 현장에서 그는 프로페셔널했고,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고유의 카리스마를 보여줘 인상적이었다. 그 시퀀스의 대사들이 굉장히 명문화된 것이었는데 실제 연기할 때 행간까지 찾아서 메워주더라. 굉장히 스윗한 분이고 K-컬처와 뷰티에 관심이 많았다. 여자친구 선물용으로 어떤 코스메틱이 좋으냐고 물어봐서 브랜드와 제품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Scene 7. 금융맨 윤정학 역 유아인을 바라볼 때 뿌듯하고 대견하다. 가능성에 기대가 되는 배우다. 변화무쌍하며 솔직하고 청춘 같은 느낌이 있어서 좋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대중에게 미움 받을 수 있는 캐릭터인데 작품의 메시지에 동의한 거라 “유아인답다”란 생각을 했다. 재정부 차관 역 조우진은 훌륭하고 작품에 정말 필요한 배우인 듯하다. 혼자 잘하면서도 함께 잘하는 에너지를 발현한다. 그 많은 작품을 하면서 겹치지 않고, 매번 좋은 연기를 하는게 가능할까, 진심으로 부럽다. 특별한 면을 가진 배우라 계속 확장해나갔으면 좋겠다. 그와 함께 연기하며 개인적으로 너무 좋은 자극과 희열을 느꼈다. 스스로를 돌아보기도 했고.

Scene 8. 여성이 작품의 내용이나 사건 등에서 주체인 작품들은 많다. 난 삶에 주체적인 여성에 매력을 느낀다. 수동적이어도 엄청난 담론을 얘기한다면 할 수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수동적인 여성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많은 관객과 소통하는 상업영화에서 여배우가 주인공인 작품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건 사실이다. 할리우드에서도 실력파 여배우들이 히어로물에서 주인공을 서포트하거나 능동적이지 않은 대상으로 나오곤 한다. 영화라는 산업의 경제논리인지 잘은 모르겠으나 소비층 등 구조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을 듯하다.

Scene 9. 결실이 없을 수도 있다. ‘미옥’처럼 지양해야 하는 결과물이 나올 경우도 있다. 내 커리어에 흠이 가더라도 꾸준히 준비하고 시도해야 한다. 내가 준비돼 있지 않은데 거저 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한지민이 어쩌다 ‘미스빽’을 한게 아니다. 주목받는 브라운관 스타임에도 영화에서 주체적인 캐릭터를 도모하는 몇 년의 과정이 있었다. 작품이 만들어지기까지 굉장히 힘들었다. 한지민뿐만 아니라 천우희, 손예진씨 모두 울면서 소상소감을 말하는데 남의 일 같지 않아 감정이 격해졌다. 속으로 ‘당신은 해냈어요. 당신과 같은 마음이에요’란 말이 솟구쳤다. 이런 상황에 선후배가 어디 있나. 후배가 아니라 동지들이다.

 

사진=CJ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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