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구 소련) 로큰롤 영웅 빅토르 최가 환생했다. 흑백 화면 속 유태오의 얼굴을 한 빅토르 최는 선선한 여름날(레토, Leto) 더욱 차가운 표정으로 스크린 앞에 섰다. 1980년대 소련, 자유를 억압받는 젊은이들의 외침은 관객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레토’는 ‘비트레이얼’ ‘스튜던트’로 유명한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의 신작이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도 한국 관객을 미리 만났다. 영화는 1981년 레닌그라드를 배경으로 자신만의 음악을 하고 싶은 자유로운 뮤지션 빅토르 최(유태오)의 발자국을 따라간다. 단순한 음악영화라고 하기에는 ‘레토’에 담긴 의미가 정말 많다.

소련이 붕괴되기 10년 전 레닌그라드에 로큰롤 열풍이 분다.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소련은 미국에서 건너온 로큰롤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고 자유롭게 즐기는 것도 거부했다. 젊은이들은 신나는 비트와 귀를 울리는 기타 연주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그렇게 자유를 향한 연주는 시작됐다.

‘레토’의 영상은 차갑지 그지없다. 영화 제목처럼 여름을 배경으로 하지만 흑백 속에 담긴 뮤지션들의 모습은 서늘하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제목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영화 초반 탁 트인 바다를 배경으로 자유롭게 노래를 부르던 뮤지션들의 밝은 표정은 시간이 갈수록 잊힌다. 어둡고 좁은 곳에서 뮤지션들은 세상에 억압받는 듯한 느낌을 준다.

1980년대 소련 로큰롤 뮤지션의 이야기를 정적으로 진행하면서 중간중간 한 편의 뮤지컬 영화처럼 흥미로운 요소를 집어넣어 보고 듣는 재미를 첨가했다. 티렉스, 빌리 조엘을 비롯해 여러 유명 로큰롤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부르는 배우들, 장면을 풍성하게 만드는 캐리커쳐와 글씨 이미지들은 ‘레토’를 지루하게 하지 않는 포인트가 된다.

유태오의 연기는 잔상처럼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빅토르 최를 조용하고 침울하며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설정으로 만든 감독의 역할이 컸겠지만 유태오는 자연스럽게 캐릭터에 녹아들었다. 러시아어 대사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빅토르 최의 노래들도 직접 부르며 감정 전달을 확실하게 해냈다. 반항아적인 표정과 능청스러운 연기는 로큰롤의 옷을 입고 빅토르 최를 환생시켰다.

로큰롤이라고 하면 엘비스 프레슬리를 시작해 데이비드 보위, 90년대 라디오헤드 등 강렬한 인상과 몸을 사리지 않는 퍼포먼스를 떠올리게 된다. ‘레토’는 이에 반한다. 그 당시 소련 로큰롤 트렌드가 사회비판적인 가사로 메시지를 전달하기에 중점을 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노래 이외에 주변 환경, 사람들의 반응을 본 관객은 ‘이게 로큰롤?’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지 모른다. 그만큼 강렬한 로큰롤 사운드로 관객을 사로잡기보다 감독이 전하고픈 이야기로 ‘레토’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영화는 음악영화이기 이전에 사회비판을 다룬 영화라고 생각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영화는 더욱 침울해진다. 이 영화가 여름날의 이야기라는 것도 까먹게 된다. 겨울이라면 모를까. 러시아가 여름에도 춥긴 하지만 보는 내내 영화와 동화된다면 감정이 다운되고 몸이 축 쳐지는 걸 느낄 수 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레토’를 만들다가 러시아 반체제 인사로 몰려 가택 구금됐다.

어쩌면 러시아의 영웅 빅토르 최를 통해 냉전시대 이후에도 끝나지 않는 억압 속에서 자유를 외치고 싶지 않았을까? 고통 속에서 조용하고 나지막하게 말이다. ‘둥, 둥, 둥’ 로큰롤 비트가 가슴을 울리는 ‘레토’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러닝타임 2시간 8분, 15세 관람가, 1월 3일 개봉.

사진=‘레토’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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