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호정(50)은 ‘책받침 여신’ 시대의 주인공 가운데 김희애 김혜수와 더불어 건재함을 과시하는 몇 안되는 스크린 디바다. 16일 개봉한 영화 ‘그대 이름은 장미’(감독 조석현)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꿈을 접고 씩씩한 싱글맘으로 살아가는 홍장미로 스며 들어가 특유의 야무진 연기를 꾹꾹 채워 넣는다.

◆ 책받침 여신 시대

어릴 때도 스스로를 '책받침 여신'이라고 생각하질 않았어요. 채시라 오연수 신애라보다 데뷔(1991년)가 조금 늦었거든요. CF모델로 활동할 때 톱스타 오연수의 의상 카탈로그 서브모델로 현장에 갔어요. 접근하기조차 힘들었죠. 특히 (오)연수가 말수가 없는 편이거든요. (신)애라랑은 동갑이라 친구로 서로 의논하고 힘든 일을 나누는 사이에요. 연수랑 (최)지우는 제가 챙겨주는 동생들이죠. 제일 오래 알고지낸 사람은 지우예요. 배우 준비하던 시절부터 알고 지냈으니까요. 제가 이재룡씨랑 연애할 때 동행하기까지 할 정도였죠.

 

◆ 그대 이름은 장미

몇 년 동안 갈증이 있었어요. 유괴당한 딸을 둔 엄마. 성폭력 당한 딸의 엄마 등 힘든 얘기들이 주로 들어왔거든요. 페이지를 넘기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죠. 이런 거 말고, 가슴 따뜻해지는 이야기를 하고싶던 차에 ‘그대 이름은 장미’ 시나리오 받았어요. 한동안 모성애를 보여줄 수 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는데 이건 온전히 모성애를 그릴 수 있는 작품이라 1도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어요. 저 역시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인데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이랬겠구나, 절절하게 이해되더라고요. 당시 엄마가 우리를 위해 어떻게 치열하게 살아갔는지 엄마 심정에서 더욱 공감됐어요. 딸의 입장으로 엄마를 연기한 작품이에요.

◆ 어머니의 이름으로

어머니는 혼자 두 딸을 키우셨어요. 엄마와 저 그리고 여동생, 여자 셋이서 치열하게 살았죠. 당신의 자식들이 ‘아빠가 없어서 버릇없다’는 소리를 듣게 하지 않으려고 사랑표현조차 잘 안할 만큼 엄하셨어요. 한번도 “우리 딸 예쁘다“란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너무 속상해서 “난 나중에 애들한테 백번씩 말해줘야지”라고 다짐했죠. 그래서 저도 엄마한테 무뚝뚝한 딸이었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엄마 탓을 많이 했어요. 너무 이른 나이인 64세에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엄마한테 표현을 많이 할 걸, 후회가 너무 되더라고요. 당시 엄마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거란 게 이젠 이해가 되고요.

 

◆ 홍장미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로 여겨지진 않았어요. 60대나 70대 어머니들이 겪으셨을 시대 배경에 주변에 정말 있을 법한 엄마들 이야기라 더 공감이 됐어요. 장미가 밑바닥 생활을 전전하며 금이야 옥이야 키운 딸 현아(채수빈)를 친부인 명환(박성웅)이 사는 미국으로 어떻게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한평생 변함없는 애정을 드러내온 남사친 순철(오정세)의 프러포즈를 왜 거절했을까...장미의 간단치 않은 선택에 공감이 갔어요. 사랑하는 딸에게 걸림돌이 되고 싶지 않은 엄마의 마음, 한 남자의 삶에 짐을 지울 수 없다는 여자의 배려가 가슴으로 와 닿았어요. 버거운 상황을 나 혼자 감당하려고 했던 장미의 독립심에도 고개가 끄덕여졌고요.

◆ ‘써니’와 ‘장미’

그때 그 시절을 살았던 파릇파릇한 청춘의 중년 캐릭터를 연기한 ‘써니’(2011)와 ‘그대 이름은 장미’는 각별하단 점에선 동일해요. ‘써니’가 친구들과의 우정을 통해 자신의 찬란했던 과거를 돌아보는 영화였다면, ‘그대 이름은 장미’는 홍장미의 인생을 통해 꿈과 사랑, 엄마와 딸의 의미를 곱씹어본 작품이죠. ‘써니’ 때 요즘 세대가 그 시절의 감성을 과연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의아했는데 공감과 재미를 느낀 데는 감독의 탁월한 눈과 연기 잘하는 친구들을 캐스팅했기 때문이죠. 연습할 때 깜짝 놀랄 만큼 너무너무 잘했어요. 그들이 불과 몇 년 새 눈부시게 성장해서 내 아이가 잘 커준 것처럼 뿌듯해요. 특히 천우희는 주연이 아님에도 너무 훌륭하게 해내서 그 신에선 배우만이 눈에 들어왔어요.

 

◆ 반전의 여자

많은 분들이 20년 전 드라마 ‘청춘의 덫’(극본 김수현)과 ‘거짓말’(극본 노희경)의 똑 부러지고 앙칼진 유호정을 오랫동안 기억하시는데 원래 성격이 소극적이고 남 앞에 나서는 거를 싫어해요. 큰 무대에 서서 내 목소리를 내는 게 아직도 부담스럽고 떨려요. 재밌는 사람도 아니고 순발력도 없고요. 그래서 예능이나 무대에 섰을 땐 긴장이 잦아들지를 않죠. 배우 못할 줄 알았어요. 이토록 보여질 게 많은 직업인데 할 수 있을까, 싶었죠. 원래 제가 빠른 배우는 아니었어요. 김수현 선생님 작품을 하면서 템포감을 배우고 많은 걸 습득할 수 있게 된 거죠. 그리고 그땐 결혼한 뒤라 남편에게 못되게 굴면서 그런 면을 끄집어낼 수 있었던 거 같아요.

◆ 배우 부부의 미덕

‘잉꼬부부’란 수식어가 늘 따라다니잖아요. 의견충돌이나 싸울 때도 생기는데 늘 화목한 부부인 것마냥 비쳐지는 것에 대한 부담감이 크죠. 그래서 신혼 때는 스트레스 받고 그랬죠. 희안하게 남편과는 별반 싸운 기억이 없어요. 뭘 싫어하고 좋아하는지를 너무 잘 아니까 맞춰졌던 것 같아요. 자식을 낳은 뒤로는 아이 앞에서 싸우고 싶지 않아서 참았고요. 같은 직업이라 가장 좋은 점은 서로 교대로 작품을 하면서 아이들을 충실하게 돌볼 수 있었단 거죠. 열여덟, 열다섯이라 조금 있으면 내 품을 떠날 텐데 그때까진 아이들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출연작이 없을 땐 최대한 애들 옆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주고 싶어요. 앞으로 성인으로서 각자의 삶을 살아갈 텐데 사랑을 받으면 자신감이 생기고, 그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여유도 생기지 않을까요.

 

◆ 여배우의 나이듦

여배우가 결혼한다는 건 더이상 멜로를 못하고, 엄마 역할밖에 못한다는 거로 여겨졌어요. 일종의 사망선고였죠. 또래 여배우들과 비슷한 시기(95~97년)에 결혼을 했는데 그 무렵 ‘미시족’이란 말이 등장하면서 저희에게 활동할 기회가 주어졌어요. 아이 키우며 일하는 엄마 역할이었죠. 요즘엔 중년 여배우가 엄마 역 말고도 멜로도 하는 등 선택의 폭이 넓어졌잖아요. 시대가 많이 변했고, 운도 좋았고, 동료들이 같이 일하면서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지 않았나 싶어요.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는 거 보면 “더이상 이렇게 해선 안되겠구나” 각성을 많이 해요. 템포도 빠를뿐더러 기존의 캐릭터 접근 방식, 감정 표현과 매우 달라요. 점프하는 감정도 많고, ‘했다치고’가 굉장히 많더라고요. 올드한 연기를 하지 않기 위해서 많이 보려 하고 배우려 해요.

 

사진=리틀빅픽쳐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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