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째 대학로를 지키는 공연이 있다. 수많은 공연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가도 금새 사라지는 요즘 ‘빨래’는 우직하게 그 자리를 지키며 관객들에게 사랑받았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빨래’는 먼 곳의 이야기나 상상 속 동화를 그리지 않고 담담히 우리의 인생을 그리며 많은 관객들에게 공감을 얻었다.

작은 소극장, 어느 곳에 앉아도 무대가 잘 보인다. 무대와 객석은 장벽이 없다. 단이 없이 객석에서 그대로 이어지는 무대는 마치 ‘빨래’가 말하고자 하는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무대 위 이야기가 아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라고.

극 중 인물들은 정말 빨래를 한다. 몽골에서 온 청년 솔롱고와 서울살이 5년차지만 아직도 이곳 저곳을 방황하며 갈피를 못잡은 나영의 첫 인사도 빨래를 너는 순간이었다. 슬플 때도 기쁠 때도 일상은 계속 반복되듯 빨래는 일상의 한 순간으로 인물들의 스토리를 이어준다.

‘빨래’는 사실 신파극은 아니다. 배꼽 잡게 웃긴 장면들이 계속 나온다. 주인공 솔롱고와 나영을 빼고 출연 배우들은 1인 다역을 통해 인도네시아에서 온 청년 마이클을 연기하다가도 또 나영이 일하는 서점에서는 야망 큰 남직원 역을 맡기도 한다. 이 조연들의 코믹한 연기가 극의 활력을 불어 넣어준다.

극 중 객석의 관객들에게 무대를 뛰어넘어 호응을 유도하기도 하고 사인회를 하니 나오라고 하는 등 관객들에게 참여를 유도하며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하지만 극 중간 중간 나오는 나영과 솔롱고의 러브스토리와 감동적인 장면들은 관객들을 설레게 만들기도 하고 울게 하기도 한다. 

주인공 솔롱고 역의 강기헌은 숨은 보석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번 22차 프로덕션으로 새롭게 단장한 ‘빨래’는 주인공 솔롱고와 나영을 모두 새로운 배우를 영입, 신선하게 재탄생했다. 지금까지 홍광호를 비롯해 이규형, 박호산 등 배우들이 거친 작품이기에 새 얼굴에 대한 기대가 컸다.

순박한 얼굴에 더듬더듬 한국말을 하며 나영에게 말을 거는 그의 모습은 첫눈에 반한 마음을 감출 수 없는 순진한 청년의 것이었지만 노래를 할 때는 달라진다. 청아한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솔롱고의 애절한 사랑 노래는 그가 왜 솔롱고로 발탁됐는지를 보여준다.

여배우들의 케미도 이 극의 빼놓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 주인 할매와 희정 엄마는 툴툴대면서도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마치 친모녀처럼 따스하다. 나영이 고된 삶에 지쳐 주저앉아 엉엉 울 때 그녀를 달래주면서도 그냥 마음껏 울어버리라며 투박한 위로를 건네는 모습은 큰 감동으로 다가온다.

주인 할매는 고된 서울살이를 몇십년 겪으며 힘들 때나 기쁠 때나 언제나 빨래를 해왔다고 한다. 이리저리 물들고 더러워지고 까슬해진 우리네 인생은 한순간에 깨끗해질 수 없지만 빨래라도 대신 벅벅 문지르며 꽉 막힌 속을 다독이고 살아감을 보여준다.

‘빨래’는 인생의 고난을 극복하고 해결해주지 않는다. 오히려 극의 말미 희정 엄마는 사업이 망한 주인 할매의 아들 때문에 단칸방에서 이사를 가고 나영은 불합리한 인사 이동에도 묵묵히 출근한다. 그럼에도 웃으며 얼렁뚱땅 해피엔딩이 가능한건 희망보다 따스한 주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일 터.

‘빨래’는 무대에 처음 올라간 14년전부터 지금까지 '당신의 서울살이는 몇해인가요?'라는 물음을 던진다. 하지만 사실 외지에서 왔던, 서울 토박이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경험하는 퍽퍽한 삶에 '빨래'는 '그래도 괜찮아'라고 따스한 위로를 전한다. 

한편 뮤지컬 '빨래'는 동양예술극장 1관에서 9월1일까지 공연한다. 

사진=씨에이치 수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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