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성영화 ‘흔들리는 물결’(10월27일 개봉)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심희섭. 올해 서른, 청년의 얼굴엔 박해일 이제훈의 잔상이 어른거린다. 상처 많은 남녀의 고요한 로맨스를 내민 평범한 듯 비범한 배우를 충무로의 루프탑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필모그래피 2012년, 스무 살 세 친구의 1박2일 여정을 그린 독립영화 ‘1999, 면회’의 대학생 상원 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천만영화 ‘변호인’의 정의감 넘치는 군의관 윤중위와 ‘암살’의 친일파 검사,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의 냉혈한 일본군 장교 켄지, 올해 tvN 예능 ‘배우학교’,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의 유대인 소년 포스너, 드라마 ‘송곳’ 마지막 회에서 좌천된 이수인을 마중 나오는 직원으로 스멀스멀 대중의 시야에 들어왔다.

연우 ‘흔들리는 물결’의 연우는 고교시절 여동생의 죽음을 목격한 이후 트라우마에 갇혀지낸다. 지방도시 단양에서 노부모와 함께 지내는 그는 병원 방사선 기사로 근무하면서도 세상과 고립된 채 살아간다. 어느 날, 시한부 판정을 받은 간호사 원희(고원희)가 그의 병원으로 부임해오며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처음으로 타인과 마음을 나누게 된 연우의 얼굴엔 생기가 돌기 시작한다.

캐릭터 “굉장히 연약한 존재다. 연우처럼 안으로 깊게 숨어들거나 죽음을 겪어보지 않아 공감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연우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모르는 인물이다.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있는가 하면 너무 동떨어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영화를 마친 뒤 그런 생각을 했다. 연우가 조금은 미소 지으려 노력하며, 세상에 한걸음 더 다가섰으리라고. 그전보다 밝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고 바랐다.”

디렉팅 “김진도 감독님은 진심이 전달되면 좋겠다고 하셨다. 극적인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절제된 연기를 요구하셨다. 더불어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를 바라셨다. 장면마다 감독님과 대화를 많이 나눴는데 ‘진심만이 본질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믿음을 가지고 해봐라’란 조언을 해주시곤 했다.”

 

 

액팅 소극적인데다 주변 인물들로 인해 변화하는 캐릭터라 미세하고 내밀하게 표현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흐름에 맞춰가는 액팅 탓에 제대로 연기를 하고 있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욕심이 생기는 걸 자제하다보니 답답했다. 에너지를 계속 유지하는 것도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최대한 관계에 대해 많이 생각하고 주변 인물들에게 집중했다.

원희 상대 여배우 고원희와는 ‘경성학교’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 그때 박소담의 절친 여학생으로 나와 강렬한 연기를 해내 기억에 남았다. "시나리오를 읽을 때 절로 원희가 떠올랐다. 지난해 5월 내내 난 촬영지인 단양에 있었고, 원희는 스케줄 탓에 서울과 단양을 오갔다. 쉽지 않은 상황이고 역할이었는데도 집중력을 발휘해 나도 집중에 도움이 됐다. 캐릭터와의 교집합이 많이 느껴졌다.”

인상적 장면 부산 여행길의 여관방에서 원희의 죽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가장 힘들었다. 그렇게 죽음을 맞이하게 된 감정의 소용돌이가 너무 거대해서 부담이 엄습했다. 연우의 모습이 이전과는 달리 보여야 한다는 강박도 있었다. 반면 둘이서 오토바이를 타는 신은 가장 아름다웠다. 상처를 지닌 두 남녀가 여느 연인처럼 서로를 가깝게 느끼며, 믿음이 생기는 순간을 보여준 장면이기 때문이다.

죽음 동네 친한 형의 장례식장에서 연우는 친구에게 “사람이 왜 자꾸 죽냐?”라며 오열한다. 영화는 여러 겹의 죽음을 덧댄다. 죽음이란 화두는 젊은 배우에게 버거울 수 있으나 더 이상 먼 이야기만도 아니다. “막연히 슬프다고 여겼지만 슬플 수만은 없는, 현재 제게는 혼란스러운 감정이에요. 이 영화를 통해 나의 죽음, 소중한 사람들의 죽음 등 죽음의 여러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 것 같아요.”

 

안재홍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찍은 영화가 ‘1999, 면회’였다. 반응이 좋아서 놀라웠다. 당시 안재홍 김창환은 연기 경험이 있던 상태라 많이 의지하고 도움을 받았다. “좋은 출발이자 추억이 된 작품이다. 동갑내기라 절친이 됐고 지금도 연락하며 잘 지내고 있다. 재홍이가 잘돼서 진짜 좋았다.”

히스토리 보이즈 학교(경기대 연극영화과) 다닐 때 연극을 했었는데 졸업하자마자 ‘1999, 면회’를 찍고 내내 영화만 해오다가 올해 4월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에 출연했다. 영국의 공립고교가 배경인 남학생들 이야기라 매력적이었다. “17세의 나약한 유대인 소년 포스너 역이었다. 잘 나가는 친구를 짝사랑하는 소외된 동성애자 캐릭터였다. 하지만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대하는 태도가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순수한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도 연극은 계속 하고 싶다.”

송강호 박신양 ‘변호인’에서 송강호와 만났다. “에너지, 연기에 임하는 자세가 충격적이었다. 동물적 센스도 엄청나고 장면마다 받아들이는 깊이와 넓이가 다르다. 존경스러운 마음뿐이다. 연기파 박신양과는 ‘배우학교’에서 스승과 제자로 조우했다. “초반에 많이 방황했을 때 선생님이 ‘진실한 모습만이 기억되고, 살아남는 원동력이다. 거짓은 금방 티가 난다. 유혹에 못 이겨서 연기하면 다 드러나게 마련이다’고 일침을 가하신 적이 있다. 지금도 그 말씀을 가슴에 품고 지낸다. 중심을 못 잡고 흔들릴 때, 나태해지려고 할 때마다 되새기곤 한다.”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 JTBC 새 금토드라마 ‘이번주 아내가 바람을 핍니다’에서 외주 프로덕션 조연출 이지훈으로 출연한다. 데이터에 따라 움직이는 알파고 스타일의 공대 출신 훈남이다. 일에서는 논리적이지만 일상에서는 어수룩한 인물이다. “자발적 모태솔로 공대 훈남이라고 하는데 정확한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일 외에는 관심이 없는, 맹하고 바보 같은 친구다. 대신 감성은 촉촉하다. 한달 전부터 촬영을 해오고 있는데 집중력이 많이 필요하더라.”

 

 

청순멍뭉미 그를 두고 언론 및 평단에서는 제2의 박해일, 이제훈이란 수사를 붙인다. 조각미남은 아니다. 평범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하얀 캔버스 같은 이미지에서 단단함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극 ‘히스토리 보이즈’ 때 교복을 입고 나와서인지, 따돌림 받는데도 순수하게 대처해서인지 이후 팬들이 ‘청순멍뭉미’라고 불러주신다. 마냥 청순하진 않은데...”

펀치드렁크 러브 독특한 걸 해보고 싶다. 강렬하고 파괴적인 거면 OK다.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영화 ‘펀치드렁크 러브’(2003)에서의 아담 샌들러처럼 찌질한데 폭력적인 언밸런스한 캐릭터에 끌린다. 자극적인 표현을 많이 하는 변태, 돌연변이 같은 인물도 좋다.

흔들리는 물결 "요즘 영화들이 대부분 강하고 화려하다. ‘흔들리는 물결’은 그런 영화와는 명확히 다르다. ‘8월의 크리스마스’ 같은 작품이 떠오르지 않을까. 공감과 여유 속에 충분히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오셔서 차분하게 영화 한편 즐기고 가시면 어떨까."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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