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경성을 배경으로 작가 지망생 소년과 천재 소설가의 미묘한 관계를 탐사한 팩션 뮤지컬 ‘팬레터’(11월5일까지·이해랑예술극장)가 공연가에 돌풍을 지피고 있다. 소설가 해진으로 탈바꿈한 배우 이규형(33)을 공연 전 극장에서 인터뷰했다.

조용한 로비에 1930년대의 멋쟁이 문인이 등장했다. 단정하게 손질한 머리와 클래식 수트, 반짝이는 검정색 구두차림 남자는 역사적 비극과 신문물의 낭만이 교차하던 그 시대에서 쏙 튀어나온 듯 보였다.

 

■ 일제강점기 문인들의 사랑과 욕망 ‘팬레터’

‘팬레터’는 18세 세훈(김성철 문성일)과 존경의 대상이던 소설가 해진(이규형 김종구)의 만남, 해진이 편지로만 교류하던 여성작가 히카루에게 사랑에 빠지면서 생기는 일을 그린다. 해진은 폐결핵으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집필활동과 사랑에 고집스레 탐닉하던 격변의 문인이다.

우수 창작뮤지컬의 해외진출 프로젝트인 ‘글로벌 뮤지컬 라이브’ 최우수 선정작 ‘팬레터’는 지난해 9월 대본 리딩, 올해 2월 쇼케이스를 거쳐 정식으로 무대에 올려졌다. 이규형은 리딩 때 참여했다가 본 공연으로 인연을 잇게 됐다.

“리딩 때 잘 다듬으면 좋은 작품이 나오겠다 싶었어요. 세훈의 2가지 인격 그리고 이로 인해 세훈과 해진이 걷잡을 수 없는 일에 휘말리는 스토리가 독특했어요. 완성본을 보니 등장인물 변화 과정, 감정선이 한층 디테일해졌어요. 배우 입장에서 좀 더 편하게 이해하고 표현하기 쉽게 바뀌었죠. 당시 문인들 모임인 7인회 멤버들이 극의 브리지 역할을 명확히 해주게 됐고요.”

 

■ 해진 vs 김유정, 백과생활탐구

해진은 29세로 요절한 ‘봄봄’ ‘동백꽃’의 작가 김유정을 모티프로 했다. 김태형 연출은 “모델로 쓰긴 했으나 다른 인물로 생각하고 연기했으면 좋겠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이규형의 뇌리에선 뒤늦게 데뷔해 불과 2년 만에 30여 편의 작품을 집필하고 사망한 걸출한 작가의 혼이 떠나질 않았다.

“그분의 어린 시절을 탐구했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났으나 어려서 고아가 됐죠. 가산을 탕진한 형은 난폭했고, 누나는 정신병 증세가 있어서 애정결핍이 심했던 인물이에요. 한때 일확천금을 꿈꾸며 금광을 찾아 떠돌아다녀 등단이 늦었죠. 가난에 허덕이다 폐병에 걸렸고요. 당시 명창 박녹주와 사랑에 빠져 격한 행동을 서슴지 않으셨더라고요.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객기도 부리다가 시간이 지나며 성숙해지는 모습이 극중 해진과 닮았어요.”

김유정의 삶이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생의 반려’를 집필하다가 운명하는 설정은 극에 그대로 가져왔다. 공교롭게 전작인 뮤지컬 ‘사의 찬미’ 역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했다. 그는 주인공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악한 사나이 한명운 역을 맡았다. 기존에는 장난기 많고 순둥순둥한 캐릭터를 주로 연기했는데 두 작품을 통해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아무래도 현대 인물이 아니라 신경을 쓰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화술도 일상적 톤으로 하면 리얼리티가 떨어질 거고, 특히 이번엔 문인이다 보니 말하는 것도 일반인과 다를 거라 여겨 고어체 구사, 단어의 장단음, 말의 리듬에 신경을 쓰고 있어요. 이제까지 했던 역할 중에 말투가 제일 느릴 거예요.”

베일에 싸인 작가 히카루에 대한 사랑의 온도는 뜨겁다. 단순히 한 여성에 대한 연모로 파악하진 않았다. 사랑에도 여러 색깔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2년 동안 자기를 불태우면서, 죽어가면서 글을 썼던 사람이잖아요. 히카루에게 집착한 이유는 작품을 쓸 수 있도록 한 뮤즈였기 때문이지 않을까요. 작가로서 모든 걸 쏟아내서 작품을 완성하고 싶은 욕망이 사랑의 부피보다 클 수 있을 듯해요. 전 이런 흐름을 더 드러내고 싶었고요. 예술가로서 이 정도의 절박함을 감히 느껴볼 수 있을지 매번 놀라게 돼요.”

 

■ 13년간 대학로 히트 연극·뮤지컬 종횡무진

필모그래피가 ‘초호화 캐스팅’이다. 지난 13년 동안 뮤지컬 ‘빨래’ ‘싱글즈’ ‘오! 당신이 잠든 사이’ ‘젊음의 행진’ ‘글루미데이’ ‘비스티 보이즈’ ‘마이 버킷 리스트’ ‘여신님이 보고 계셔’ ‘위대한 개츠비’ ‘은밀하게 위대하게’, 연극 ‘극적인 하룻밤’ ‘나쁜 자석’ ‘유럽블로그’ ‘두근두근 내 인생’ ‘날 보러와요’. 대학로 인기작들은 거의 섭렵했다.

“제 정서가 그래서인지 대극장 작품은 너무 먼 나라 이야기 같았어요. 대극장 뮤지컬은 버라이어티 쇼라 관객의 눈과 귀를 충족시켜줘야 하는데 노래를 아주 잘하는 배우가 아니고요. 전 드라마가 탄탄한 작품을 좋아해요. 소극장에서 관객과 가까이에서 소통하고 직접 호흡을 느끼면서 할 수 있는 게 더 재미있더라고요.”

10대 시절 영화 ‘쉬리’를 보고는 매료돼 배우를 꿈꾸게 됐다. 중동고 연극반에서 활동했고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연극을 전공하며 소극장 무대를 추구했던 이유도 교수, 선배들이 “소극장에서 작고 섬세한 연기를 하면 영화에서 카메라 매체를 접했을 때 훨씬 도움이 될 거다”는 조언에 힘입은 바 크다.

최근 들어 어렸을 적부터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는 중이다. 영화 ‘나의 독재자’ ‘봉이 김선달’ ‘열정같은 소리하고 있네’에 작은 역으로 출연했다. 내년 1월에는 새 영화에 들어간다. 다음달 방영하기 시작하는 KBS2 월화드라마 ‘화랑: 더 비기닝’에선 악역으로 시청자들과 만나게 된다.

“조금씩, 천천히 하고 싶어 했던 영화·드라마쪽으로 걸어 나가는 중이에요. 그렇지만 무대를 워낙 좋아하니 연극·뮤지컬과는 계속 동행하려고요. 지금도 연극 ‘날 보러 와요’를 병행하고 있어요. ‘마이 버킷 리스트’의 중국 상하이 쇼케이스에 초치기로 다녀왔고요. 뮤지컬 데뷔작 ‘빨래’는 7년에 걸쳐 매년 빠지지 않고 출연해오고 있고요.”

배우 외에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는 연출과 강의다. 군 제대 후 아르바이트로 연기레슨을 7년 정도 했는데 적성에 맞았다. 스스로에게 도움이 많이 됐다. 기회가 되면 모교에서 후배들을 가르쳐보고 싶다. 마침 그가 매일 밤 서고 있는 이해랑예술극장은 모교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사진 김상곤(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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