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거침없는 똘끼를 발산했던 ‘잉투기’로 눈도장을 쾅 찍었던 엄태화(35) 감독이 올 가을, 정반대 색깔의 감성 판타지 ‘가려진 시간’(16일 개봉)을 통해 명품 감독으로 비상을 꿈꾼다. 영화는 아름다운 섬 화노도에서 실종사건이 벌어진 후 단 며칠 만에 어른이 돼 나타난 소년 성민(강동원)과 유일하게 그를 믿어준 소녀 수린(신은수)의 특별한 이야기를 그렸다.

 

완연한 가을, 삼청동에서 만난 그는 아직 개봉 전인데도 많은 관심을 받는 탓에 “얼떨떨하다”며 머쓱한 웃음을 지어보였다. 만화적 상상력이 가득한 영화 때문에 으레 ‘오타쿠’ 같은 이미지일 거라 예상했지만, 젠틀한 화법과 선한 웃음을 지닌 ‘꽃 감독’이었다. 

 

Q. 연출 뿐 아니라 각본까지 썼다. 홀로 성장하는 소년의 이야기가 가슴에 촉촉한 감상을 심는다. 독특한 이야기를 떠올린 계기가 있을까?

A. 처음엔 ‘멈춘 공간’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어요. 원래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한 후엔 그에 맞는 이미지를 찾고 나서 본격적으로 구상을 하는 편이라, 여기저기서 이미지 서칭을 했죠. 그러다가 ‘아이 같은 성인 남자’와 ‘어른 같은 소녀’가 거대한 파도 앞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서 있는 그림을 발견했어요. 그때 ‘이 둘은 무슨 사연이 있을까?’라는 궁금증이 일더군요. 여기에 원래 하고자했던 시공간의 이야기를 포개서 ‘가려진 시간’이 된 거죠. 영화 속에 그 그림을 형상화한 장면도 있어요. 

 

Q. 시간이 멈춘 세상에 홀로 남겨진다면 어떻게 시간을 보낼 것 같나? 영화를 만들면서 한 번쯤은 이 상상을 해봤을 것 같다.

A. 제가 영화를 오직 화노도에만 한정한 이유가 섬이 아니면 세계여행을 떠날 것 같아서 그런 거예요.(웃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열심히 돌아다니지 않을까요? 북한처럼 못 가볼 나라도 구경해볼 수도 있고요. 오히려 즐거웠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이런 상상을 했기 때문에 좀 더 아이들을 고립돼 있고, 권태롭게 만들려고 섬 설정을 활용했어요. 

 

Q. 시사회 후에 ‘레옹’이나 ‘늑대 소년’과 비교되기도 한다. 비주얼적 측면에선 ‘빅 피쉬’를 닮은 것 같기도 한데, 다른 작품과 유사하다는 평가가 썩 기분 좋을 것 같지는 않다.

A. 멈춘 세계를 다룬 영화는 이미 많이 있었어요. 그리고 ‘늑대 소년’ 같은 경우도 순정만화 베이스의 힐링 이야기라는 측면에서 비슷하죠. 비슷한 게 이미 나왔다고 해서 피해갈 이유는 없었어요. 오히려 그걸 가지고 어떤 이야기를 하느냐가 더 중요한 거죠. 전형성이라는 건 그만큼 소통이 쉽다는 이야기니까,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확고하면 더 쉽고 확실하게 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부분에 중점을 뒀습니다. 

 

Q. ‘가려진 시간’은 어른-아이, 상식-비상식의 대치가 눈에 띈다. 확실히 상식적인 시선에선 ‘아동 성 범죄’ ‘납치’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기도 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에게 비상식의 눈으로 영화를 바라보게끔 만든다.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었나?

A. 사실 이야기를 쓰면서 어떤 메시지를 정해놓지는 않아요. 오히려 영화가 완성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의식 속 메시지를 발견하는 편이지요. 어쨌든 ‘가려진 시간’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인 것 같아요. 진실은 주관적인 거니까요. 아마도 지금이 암울한 시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돌이켜보면, 어렸을 땐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의심하지 않았잖아요. 근데 점점 논리의 세계로 들어가면서 서글프게 믿음을 잃죠. 아마도 의심이 늘고, 믿음이 옅어지면 어른이 되는 거 같아요.

 

Q. 그러고보니 ‘잉투기’와 ‘가려진 시간’, 두 작품 모두 성장의 외로움을 다루는 것 같다.

A. 아이나 어른을 떠나서 사람이 사는 것 자체가 외로운 일인 것 같아요. ‘인생은 혼자 사는 거야’라는 말도 있잖아요.(웃음) 영화에서 ‘뭘 기대면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정도는 던지고 싶었어요. ‘잉투기’에서 외로움에 몸부림치는 어른이 웹 텍스트에 집착하는 것이나, ‘가려진 시간’ 속 외로운 소녀의 판타지가 현실화 되는 이야기까지 모두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성장인 거죠. 그 가운데 중요한 걸 찾는 건 관객 분들의 몫이고요.

 

Q. 그런 섬세한 메시지가 가슴에 폭 안기는 건 아무래도 주연 강동원의 힘이 컸던 것 같다.

A. 아이 같은 성인 남자. 당연히 강동원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30대 중반인데도 풋풋함은 물론이고, 장난꾸러기 이미지와 ‘만찢남’ 외모가 영화에 꼭 어울리니까요. 너무도 당연히 시나리오를 보냈죠. 그런데 아마 정말 고민이 많았을 거예요. 신인감독인데다가, 그 정도 파워를 가진 배우가 13살 여자애가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이야기에 참여하기 쉽지 않았겠죠. 정말 굉장한 도전을 했다고 생각해요. 고맙고, 존경할만한 지점이지요. 

 

Q. 아역 배우 신은수는 300:1 경쟁률을 뚫고 캐스팅 됐다고 들었다. 연기 경력도 전무해 쉬운 선택은 아니었을 듯한데...

A. 외로움을 느낀다는 정서가 아이들이 느끼기는 쉽지 않잖아요. 오디션 때부터 그걸 잘 표현하는 아이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신)은수를 처음 봤을 때, 딱 그 느낌을 받았죠. 속으로 ‘얼굴에 이야기가 있구나...’라고 중얼거렸어요.(웃음) 원래 그 친구가 JYP 가수 연습생이에요. 어느 정도 감성과 끼가 증명된 거니까요. 연기 경험이 없어도 잘할 것 같았죠. 한 달 정도 트레이닝을 했는데, 흡수하는 속도도 빠르고 너무 잘해요. 천재가 아닐까요?(웃음)

 

Q. ‘가려진 시간’에 동생 엄태구가 힘을 실었다. 최근 ‘밀정’으로 스타덤에 오른 엄태구를 보면 기분이 남다를 것 같다.

A. 동생이란 작업을 하는 건 사실 다른 배우들이랑 하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다만 서로 잘 알기 때문에 서로 친해질 시간이 따로 필요 없다는 게 좋죠. 꽤 오래 힘들었는데, 요즘 잘 풀려서 지 앞길은 알아서 잘 헤쳐 나가지 않을까 해요.(웃음) ‘가려진 시간’ 촬영할 때는 ‘밀정’ 개봉 전이라 그러려니 했었다가 요즘에 시사회에서 인사만 해도 좋아해주시더라고요. 흐뭇하죠. 과묵한 이미지는 저랑 있을 때도 똑같아요. 서로 마음을 잘 아니까, 필요한 말만 하는 거죠.

   

Q. 마지막으로 이제 개봉이 얼마 남지 않았다. 예비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제가 더 영화에 대해 설명하기보단 극장에 오셔서 느껴지는 대로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재밌기도 하고, 혹은 지루하기도 하실 거예요. 그래도 바람이 있다면 집에 돌아가셔서 잠들 때, 아니 그 날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다시 한 번 기억 속에서 불쑥 떠오르는 그런 영화로 남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진 지선미(라운드 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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