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성화(41)가 뮤지컬 ‘킹키부츠’의 여장남자 롤라와 작별하자마자 지난 10일 개봉한 영화 ‘스플릿’의 악당 두꺼비로 관객과 인사하고 있다. 활력 가득한 몸짓의 그가 삼청동 카페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밝은 기운이 스멀스멀 높은 천장을 가득 채우는 느낌!

 

◆ 열등감 사로잡힌 악당

도박볼링을 소재로 한 ‘스플릿’은 과거 볼링계의 전설로 이름을 날렸던 철종(유지태)이 불운의 사고로 모든 것을 잃은 뒤 도박 볼링판 선수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 속 첫 등장부터 위압감이 넘쳤던 정성화는 선수시절 이후 철종에 대한 질투와 열등감으로 인해 악연을 맺어온 일명 ‘두꺼비’, 두종오로 출연한다. 토우볼링장의 실소유주이자 도박 볼링판에서 판돈을 걸며 재력을 과시하는 인물이다.

“의외로 쉽게 했던 부분이 캐릭터에 정성화를 많이 녹여냈기 때문이에요. 사람이 살다보면 악해지는 경우 있는데, 그런 악함을 드러내는 트리거를 철종이라고 설정했어요. 저도 무명시절에 열등감, 패배감에 사로잡혔던 적이 있기에 그런 기억도 끄집어냈고요.”

서울예대 연극과 재학 중이던 1994년 SBS 공채 개그맨 3기로 데뷔한 그는 “뭘 해도 중간 이하” “어정쩡하다”는 소리를 빈번하게 들었다. 열등감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유명인들과 어디를 함께 가면 스포트라이트는 늘 그들에게 향했다. 설움이 가슴 한편에 똬리를 틀었다.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이번에 철종을 바라보며 과거를 리마인드했다.

“처음엔 의아했어요. 철종이를 시원하게 한 대 때리고 각자 열심히 살면 될텐데 왜 저리 괴롭힐까. 철종을 괴롭히면서 얻는 쾌감 때문이었던 듯해요. 뭘 해도 철종에게 비교 당하고, 경기에서는 패배하고...결국 실력으로는 이기지 못하고 딱 한 번 편법으로 이겼던 게 마음에 응어리로 남았을 거예요. 두꺼비에게 철종은 놓지 못하는 끈과 같은 대상이죠.”

◆ 캐릭터 변신 쾌감

‘스플릿’ 출연 제의를 받았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동시에 반가웠다. 뮤지컬에서는 진중한 주역을 연기해왔으나 드라마와 영화에선 코믹한 감초 역할을 맡아왔기 때문이다.

“악역이라는데 안할 수가 없었죠.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있듯이 제 영화 필모그래피에서 ‘스플릿’이 그런 포인트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정성화가 맨날 쾌활한 역할만 했는데 저런 역을 해내는구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구나란 생각을 심어주지 않을까요. 편견을 깨트리는 게 너무 좋아요. 성취감, 쾌감을 느끼게 되니까요. 뮤지컬에서도 여장남자를 연기할 때 끝날 때쯤 ‘예뻐 보인다’는 말을 들으면 정말 기쁘고 재미나요.”

정성화는 지난 13일 ‘킹키부츠’ 막공을 마쳤다. 폐업 위기에 처한 구두공장을 운영하게 된 청년 찰리가 드랙쇼를 하는 자유분방한 여장남자 롤라를 우연히 만나게 된 뒤 신선한 아이디어를 얻어 공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내용의 재연 무대를 특유의 활력과 천연덕스러운 연기로 흥행 성공시켰다. 여장남자 연기는 뮤지컬 ‘라카지’, 연극 ‘거미여인의 키스’에 이어 3번째다. 워낙 신명나게 ‘킹키부츠’에 몸을 실었기에 다음 무대에 다시 꼭 서고 싶단다.

 

◆ 무대에서 빛나는 배우

중장년 세대에게 정성화는 개그맨의 잔상이 많이 남아 있다. 반면 젊은 세대는 그를 국내 톱클래스 뮤지컬배우로 인식한다. 한 인물을 바라보는 인식의 괴리가 꽤 큰 셈이다.

“개그그룹 ‘틴틴파이브’에 들어간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잘렸어요. 잘 못했던 거죠. 충격이 커서 그때 군입대를 했어요. 도피처였던 셈이죠. 그 안에서 생각했던 게 많았어요. ‘제대 후엔 더 잘해야지’라고 의지를 다졌죠. 제대 후 드라마 ‘카이스트’가 히트하면서 다시 진지함이 사라졌어요. 뭘 해도 중간 이하였죠. 그러다가 일도 없어지고, 돈도 떨어지고....다시 본질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어요.”

그 무렵 연극에 출연했는데 설도윤 대표(설앤컴퍼니)가 보고는 뮤지컬 ‘아이 러브 유’에 캐스팅을 했다. 남경주와 호흡을 맞춘 이 작품은 관객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고 ‘뮤지컬배우 정성화’를 탄생시켰다.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나를 옭아맸던 열등감에서 벗어난 순간이었으니까요. 그동안에는 내 일을 사랑해본 적이 없었는데 사랑할 대상이 생긴 거였으니까요. ‘무언가를 하려면 사랑해야하는 구나’로 가치관마저 바뀌었어요. 그리고 15년을 달려온 거죠. 지금은 점점 부담이 커지지만 그만큼 성취감을 느껴서 행복해요.”

스스로가 잘 할 수 있는 길을 찾게 된 이후 승승장구였다. 대작 ‘영웅’의 안중근 의사, ‘레미제라블’의 장발장, ‘맨 오브 라만차’의 돈키호테는 정성화의 전매특허 캐릭터가 됐다. ‘레미제라블’로는 2013년 더뮤지컬어워드, 한국뮤지컬대상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

 

■ ‘개그맨 꼬리표’ ‘가창’ No문제

개그맨 출신이란 꼬리표가 카리스마와 무게감을 필요로 한 무대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았을까.

“오히려 덕 본 경우가 훨씬 더 많았어요. 못할 거 같은데 잘하면 더 잘하는 것처럼 느껴지잖아요. 특히 개그맨 시절에 했던 순발력 훈련이 뮤지컬이나 영화 연기에서 많이 쓰여요. 일반적 연기에 저의 순발력을 조금만 첨가하면 연기가 굉장히 다이내믹해지거든요. 뮤지컬 안에서는 웃기는 신이 없어도 코믹 요소를 가끔 발현해야할 때도 큰 도움이 되고요.”

대작의 남자주인공으로 빈번하게 캐스팅될 만큼 그의 가창력은 관객뿐만 아니라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도 높은 평가를 듣는다. 음대에서 성악을 전공했거나, 가수로 숱한 무대를 경험하지 않았음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다.

“테크닉 보다는 노래와 가사의 의미에 대한 이해와 표현이 잘 돼야 가창력이 좋아지는 것 같아요.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하는데 감동이 없는 친구들이 있는데 감성이 제대로 전달되질 않아서 그런 거죠. 지금도 트레이닝을 받고 있어요. 작품에 따라 선생님을 바꿔 가면서 발성, 보컬 연습을 진행하고 있죠. 최대한 내 보컬 안에서 색을 덧입히는 방법을 찾아가는 거죠.”

 

■ “내 인생의 퍼펙트 게임은 ‘영웅’”

‘스플릿’ 예찬을 멈추지 않는다. 태어나서 딱 세 번 쳐본 볼링을 이번에 폼부터 배워가며 마스터했다. 팔을 높이 들어 올리는 파워볼링에 집중적으로 매진해 이제는 동호회 멤버 수준이 됐다. ‘스플릿’은 그간 나왔던 스포츠영화 중 스포츠(볼링)와 드라마의 어울림이 가장 좋았던 작품이라는 찬사도 잊지 않았다. 무엇보다 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볼링 소재. 못 듣던 사운드, 못 보던 그림, 못 보던 연기가 있는 작품이라고 웅변했다.

마지막 질문으로 던졌다. 당신의 연기 인생에서 ‘퍼펙트 게임’은? “2009년에 했던 ‘영웅’이에요. 초연이었는데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고, 완벽하게 잘되는 느낌이었어요. 열심히 준비만 해서 올렸는데 관객들이 기립박수를 치셨어요. 입소문이 나면서 티켓전쟁 일어나고, 도대체 이게 뭘까 싶을 정도였어요. 모든 것이 퍼펙트했어요.”

그 완벽한 ‘영웅’을 가지고 내년 1월16일부터 3주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사진 최교범(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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