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을, 대서양을 최초 횡단한 진취적인 여류비행사 아멜리아 에어하트에서 영감을 얻어 애슬레저 룩과 테일러드 룩을 결합한 의상으로 뉴욕과 파리패션위크 런웨이를 당당하게 장악한 주인공 이청청. K-패션의 신선한 매력을 글로벌 무대에 알리고 있는 대표적인 디자이너다.

유명 디자이너 이상봉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떼고 지난 2013년 론칭한 여성복 브랜드 라이를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시켰다. 현재 미국·유럽·홍콩 등 13개국 60여 편집매장과 백화점에 진출시켰다.

올해 뉴욕패션위크와 서울패션위크 19F/W에서 전통과 하이테크, 동서양 문화가 공존하는 ‘서울’을 테마로한 컬렉션을 선보인데 이어 이달 들어서만 싱가포르 19S/S시즌 쇼케이스, 상하이·베트남 F/W 패션위크에 연이어 초청받아 참가하는 열일 행보를 벌이고 있다. 주목받는 젊은 디자이너 이청청을 봄기운이 완연해진 4월, 청담동 라이 매장에서 만났다.

그의 이력은 독특하다. 원래 대학에서 역사교육학을 전공했다. 주말에도 쉬지않고 일하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그는 평범하게 살고 싶었고, 교사를 꿈꿨다. 하지만 내면에 흐르는 피와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미술공부를 하다가 창의적인 커리쿨럼으로 유명한 패션명문인 영국 센트럴 세인트 마틴스 예술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아트디자인과 남성복을 전공했다.

2011년 런던 신진 디자이너어워즈 남성복 부문을 수상하며 현지에서 디자이너로 데뷔까지 했다. 당시 그의 컬렉션은 파인아트와 모더니즘의 공존, 컬러 배색의 적절히 활용, 댄디한 느낌의 제품들이 주를 이뤘다. 이후 귀국해 이상봉컬렉션 디자인팀장을 역임한데 이어 2013년 라이를 론칭했다. 남성복 디자이너가 여성복 디자이너로 터닝한 셈이다.

여성의 모던한 라이프스타일을 제안하는 라이는 볼드한 색상과 소프트한 디테일을 활용한 입체적이고 로맨틱한 컬렉션을 선보여 여성복 시장에 든든히 뿌리를 내렸다. 해외 바이어들은 ‘유니크함’을 추켜 세운다. 패브릭 믹스, 컬러조합에 있어 실험적이면서도 웨어러블하다는 것이다. ‘예쁘고 화려하지만 입기 힘든 옷’의 안티 테제가 라이가 가는 방향이다.

“남성복을 매우 좋아했지만 꿈 가운데 하나가 ‘이상봉 브랜드’를 맡아서 운영하는 거였어요. 외국의 구찌, 샤넬처럼 대를 이어 럭셔리 하우스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싶어 여성복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빨리 기회가 온 셈이죠. 국내 남성복 시장이 작은 현실적 요인도 있었어요. 세일즈 기반을 만들고 싶었는데 여성복이 더 폭넓었으니까요. 남성복 브랜드는 곧 론칭하고 싶어요.”

패션을 전공하던 학창시절부터 직접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가 사랑한 패션 디자이너들의 스펙트럼은 깨나 폭 넓다. 영국의 요절한 천재 디자이너 알렉산더 맥퀸의 창의적인 면모. 폴 스미스의 위트 넘치는 패션, 꼼데가르송의 전위적이면서도 브랜드에 대한 확고한 아이티 등을 좋아하며 존경한다.

“패션 트렌드가 계속 돌고 도는 것에서 드러나듯 현대의 디자이너는 발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존의 여러 가지 요소를 잘 접목해서 재탄생시키는 사람이라고 여겨요. DJ처럼 믹싱 능력이 관건이겠죠. 예전에 있었던 소스를 잘 결합시키는 게 재미나요. 위트를 좋아하고요. 미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개성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포장하고 만들어주는 것이 곧 라이의 방향성이기도 하죠.”

융복합, 협업은 패션 디자이너인 그에게 있어 화두다. 부담이나 압박이 아니라 신명나는 놀이다. 지난달 열린 서울패션위크에서 글로벌 가방브랜드 쌤소나이트와의 콜라보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전선에 선 그가 체감하는 ‘코리아 패션’의 현주소는 어떨까. 그간 대중이 인식하는 해외 무대에서의 한국패션 위상은 디자이너보다 한혜진 송경아 수주 혜박 등 모델들의 활약상으로 깊이 각인됐다.

“해외에 한류가 드라마, 음악으로 많이 알려졌고 그런 콘텐츠와 함께 한국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함께 소개되기 시작했어요. 배우들의 출연 의상, 가수들의 무대의상이 예쁘니까 관심을 가지면서 한국 패션이 매우 감각적이란 평가를 듣고 있는 것 같아요. 해외 유명 컴피티션들을 보면 탑에는 한국 디자이너들이 꼭 포함돼 있어요. 굉장히 유행에 민감해 트렌디하면서도 조합하는 능력이 뛰어나거든요.”

열변 모드다. 한국 디자이너들의 강한 유동성, 거부감 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능력이 해외 패션 관계자들에게 매력적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뷰티도 그렇지만 패션에서도 ‘색을 쓰는 능력’에서 서구의 전문가들과 차이가 난다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그의 답변은 긍정적이다.

“예전에는 어두운 톤이 유행해서 블랙&화이트를 주로 구사했다면 지금은 얇고 화사하고 컬러플하고 색채적인 게 굉장히 강조되고 있죠. 그래서 디자이너들이 컬러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을 거고 시장성의 문제도 있었어요. 동양인은 스킨톤 때문에 밝은 노란색이나 하늘색이 서양인들처럼 잘 맞지 않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소비자들이 수용하는 자세가 돼 있어서 과감한 컬러 플레이가 가능해지고 있는 것 같아요.”

현재 그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패션X테크) 기술을 입는다’ 프로젝트에 정원석 작가, 에이브릭트 랩과 함께 ‘아트&프로젝트’란 그룹으로 참여하고 있다. 오리·거위털 등 충전재 채취과정에서의 비극적 요인을 제거하기 위해 공기를 주입해 순간적으로 부풀어오르는 의상을 제작, 서울패션위크에서 소개하기도 했다. 3벌을 준비했다가 1벌만 성공했으나 좋은 반응에 힘입어 뉴욕 소호의 ‘더 셀렉트’에서 전시를 하고, 세미나도 진행했다.

대화 중 아버지 이상봉 디자이너를 ‘선생님’이라고 호칭해 이채로웠다. 아버지이기 이전에 패션업계의 ‘멘토’로 여기는 모습이다. 

“선생님께서 늘 ‘디자이너는 99퍼센트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음으로 열정과 창의성이다’고 말씀하세요. 아버지로부터 디자이너의 자세를 가장 크게 영향받았어요. 쇼를 무대에 올릴 때까지 끝까지 노력하는 모습 자체가 제겐 무엇보다 큰 자산이 됐죠. 혹여 영향을 미칠까봐 제 결과물에 좋다, 싫다란 표현도 안하세요. 저도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하고요. 같은 디자이너이지만 감성도 틀리고, 브랜드의 목적도 틀리니까. 아버지의 열정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이에요.”

좋은 디자이너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이청청은 ‘호기심’이라고 꼽는다. 궁금해 해야 평범함을 뛰어넘는 작업물이 만들어진다. 평상 시 좋아하는 것들을 재미난 유희로 만들며 일하는 ‘태도’가 현재의 그를 있게 한 원동력으로 여겨진다.

사진=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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