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기의 질감이 달라지고 해가 길어지기 시작하는 2월 말. 겨울과 봄의 사이는 홍차가 가장 맛있는 계절이다. 홍차를 마시는 지극히 개인적인 취향. 

 

#1. 방금 찻물이 끓었다 

펄펄 끓는 물을 바로 찻잔에 부으면 찻잎 또는 티백의 향이 제대로 우러 나지 않는다. 섭씨 90도 정도가 알맞다는 커피보다 더 낮게, 삼키기 어려운 정도는 아닌 뜨거움이 좋다. 이렇게 한 김 식은 물을 천천히 잔에 따른다. 

 

 

#2. 우러나는 동안 어슬렁대기  

찻잎이 몸을 리드미컬하게 틀면서 다갈색으로 퍼지는 것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턴 부러 보지 않는다. 향기가 물 속으로 몸을 충분히 틀 때까지 기다리고 싶어서, 참을성 없이 갈급하는 여자처럼 보일까봐. 

 

#3. 찻잔만 쥐어도 행복해진다

잘 우러난 홍차가 담겨있는 찻잔은 두 손으로 그러쥐기만 해도 행복해진다. 코끝에 대면 찻잎을 덖고 말리면서 굽은 허리를 토닥였을 이국의 푸른 눈이 떠오른다. 비를 흠뻑 맞으며 향기를 품었을 대지의 꽃들도 달려온다. 

 

 

#4. 좋은 차는 좋은 대화를 만든다

진실로 그렇다. 좋은 차를 마시면 입 안에 잔향이 놀라울 정도로 오래 남기 때문에 그런 입으로는 험하고 피곤한 말을 하고 싶지 않아진다. 향기로운 대화까진 아니어도 향으로 입 안을 적신 다음 꺼내지는 말은 어지간해선 뒤틀리지 않는다. 

 

#5. 조금씩 천천히, 재탕하지 않는다

홍차는 녹차가 아니다. 제대로 된 향은 첫 잔에 다 담긴다. 관계에 자신없을 때 지난 일을 곱씹어 확인하고 불안해하듯, 여러 차례 우려낸 차는 결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애인처럼 떪고 지저분한 맛만 남길 뿐이다. 

 

 

#6. 티타임은 선물이다 

정성들여 우려낸 홍차 한 잔은 그 한잔으로 충분히 많은 선물을 한다. 찻물을 끓이고 우려내 음미하는 동안 대화하고 마음을 닦고 음악을 듣는다. 홍 차 한잔에 단단히 포박당하는 즐거움, 2월 말 어느 주말 오후의 호사다.  

 

사진출처: 떼오도르 코리아 페이스북, 마리아쥬 프레르 파리, 트와이닝코리아 페이스북

에디터 안은영 eve@slist.kr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