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씽: 사라진 여자’(감독 이언희)가 지난달 30일 개봉 이후 34만9635명을 모으며 박스오피스 2위를 순항 중이다. ‘소원’의 강인한 엄마, ‘더 폰’의 살해당한 아내, ‘경성학교’의 비밀을 간직한 교장으로 빨간 인장을 찍었던 엄지원은 보모와 함께 사라진 아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싱글 워킹맘 지선으로 나와 절박한 감정의 심지에 불을 댕긴다.
11월에 마침표를 찍는 날,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여배우는 예의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한국적인 된장 베이스 스릴러”라고 주연작을 명료하게 설명했다.
■ "인물 설계와 건축...건축과 남편과 닮은꼴"
영화 ‘소원’ 땐 욕심은 났으나 결혼하기 전이고, 모성의 깊은 상처를 감히 표현할 수 있을지 겁이 났다. 정말 깊이 있는 모습을 표현해야 했다. ‘미씽’의 경우는 아이를 둔 엄마지만 워킹우먼이라 공감하는 바가 많았다. 또 주변 일하는 친구들로부터 아기를 보모한테 맡김으로써 생기는 이야기도 많이 들어서 겁이 덜 났다.
“5일에 걸친 이야기인 ‘미씽’의 예산에 한계가 있어 프로덕션 과정이 타이트했다. 감정이 격한 영화는 순서적으로 찍도록 배려되는데 한매를 찾아다니느라 로케이션이 많아 뒤죽박죽 찍어야했다. 감정선이 어떻게 돼야 하는지 꼼꼼하게 계산해야 해서 대본을 정말 많이 봤다. 감정선에 따라 색깔도 다르게 표시해놨다. 그렇게 설계하지만 현장에서의 감정도 중요하니까 집중해야 했다.”
사용하는 용어, 작업 방식이 남편과 닮아 있는 느낌이다. 엄지원은 지난 2014년 유명 건축가 오영욱과 결혼했다.
“정확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하는 방식인데...그러고 보니 흡사하다. 인물과 감정을 설계해야 건물이 올라가는 거니까. 나의 작업방식 자체가 감정의 레벨, 농도, 변화를 디테일하게 설계하는 편이었다. 밑그림을 촘촘하게 그리고, 현장에서 다 버리고 순간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것 없이 ‘생’으로 연기한 적이 없었다.”
■ "모성, 사회가 가하는 여성에 대한 폭력 공존"
‘미씽’으로 안내한 첫 번째 이유는 좀처럼 만나보지 못했던 완성도 높은 투톱 여성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여성이 리드하는 건 호러장르가 대부분이라 “한번 잘 해봐서 좋은 결과를 내고 싶다”는 소망이 솟구쳤다.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이드 혹은 소모되는 경우가 많다. ‘더 폰’ 때도 대사 대부분이 ‘어떻게 하지?’ ‘어떻게 된 일이야?’였다. 그래서 감독님께 연수 캐릭터에 대해 한번 브레인 스토밍 해보자며 ‘이런 문제가 있는 거 같다. 의사니까 해결의 키를 이렇게 가져가면 어떨까요?’라고 제안을 많이 했다. 연약하고 두려워하기보다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미씽’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영화라 반가웠다.”
미스터리한 보모 한매(공효진)과 딸 다은의 행방을 찾아 전국을 질주하는, 심지어 깊은 물속까지 빠져들어야 했다. 육체적으로 힘들 거라는 건 시나리오에 명확히 나와 있어서 각오를 단단히 하고 임했다. 평상시 매일 2시간씩 운동을 해왔기에 기초체력이 받쳐줬다.
“지선의 감정을 연기하는 게 아프고 힘들었다. 뛰고 달리면서 감정을 유지하는 점이 버거웠으나 촬영현장에서 남녀 시선의 차이로 인해 분분한 의견을 하나로 모으느라 안팎으로 에너지를 많이 쏟았다. 단적인 예로 남성 스태프가 위대한 모성을 강조했다면 나-감독-(공)효진의 생각은 달랐다. 여성 DNA 안에 모성은 장착돼 있는 거라 극한 상황에서 모성이 어떤 모습으로 발현되는가와 더불어 사회가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을 잘 풀어내고 싶었다.”
‘미씽’을 촬영하며 남녀 시선이 이토록 다름을 절감했다. 페미니스트나 여성운동가는 아니나 우리 사회에 여성에 대한 혐오시선이 만연해 있음을 싸우면서 피부로 느꼈다.
■ "공효진은 나와 색깔 다른 여배우"
여배우와의 작업은 아주 좋았다. 여태껏 작업한 배우 중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건 카운터파트가 공효진이였기 때문이다.
“성격상 잘 맞고 영화 보는 시선도 일치한다. 그래서 이번에 같은 방향을 보면서 욕심내지 않고, 서로 격려하며 작품이 잘 되도록 하모니를 일궜다. ‘미쓰 홍당무’ ‘러브픽션’ 등 효진이가 출연한 영화는 거의 다 본 듯하다. 동시대에 활동하는 배우들이라 서로 관심이 많다. 원래 친분이 있었는데 이번에 녹록치 않은 작품을 하면서 서로를 더 잘 알고, 신뢰하게 됐다.”
엄지원과 공효진은 색깔이 다른 여배우다. 엄지원이 정확한 발음으로 자로 잰 듯 정교한 연기를 추구한다면, 공효진은 자유로운 감성으로 판을 뒤흔든다. 김수현 드라마를 기준점으로 삼자면 엄지원은 최적화된 배우다.
“김수현 선생님 작품을 할 때는 잠을 못 잔다. 대사 토씨마저 반복 체크한다. 나 역시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서 원형탈모가 생길 정도로 스트레스가 극심하다. 효진이와 난 연기 스타일이 많이 다르다. 그녀는 대본을 파기보다 현장의 흐름, 감정에 집중한다. 달라서 서로 배운다. 내가 못하는 걸 해내며 어떤 면은 정말 좋다. 성격적으로도 난 우유부단한데 효진이는 정확하고 투사 같은 기질이 있다. 상황이 꼬이면 ‘잠깐만 언니!’ 하고는 딱 정리해준다. 서로 밀어주고 끌어주는 스타일이다.”
■ "유니크한 캐릭터의 저예산영화 출연 검토 중"
싱글 워킹맘 지선으로서도, 인간 엄지원으로서도 소중한 걸 깨닫는 계기가 됐다.
“많은 워킹맘들의 이슈는 커리어인가 육아인가인데 이혼녀 지선은 육아를 위해서라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업무 탓에 육아가 뒷전이 돼버려 죄의식으로 남아 있었다. 나도 앞으로 엄마가 되고 육아를 해야 하는데 이번에 너무 많은 걸 경험해서 고민이다. 좋은 엄마가 되지 않을까 낙관한다. 좋은 남편과 시부모님을 만나 아직은 무언의 출선 압력 없이 배우로서 커리어 쌓아나가는 걸 응원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
몇 년째 영화에 ‘올인’ 중이다. 기존에 했던 것과 비슷한 건 피한다. 마음을 사로잡는 재미 여부를 따진다. 인물이 비중이 작더라도 확장시킬 수 있고, 재미나게 풀어낼 수 있으면 선택한다. ‘경성학교’가 그래서 한 작품이다. 아무리 주인공이라도 매력 없으면 못한다. 요즘엔 유니크한 캐릭터의 저예산영화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있다. 12월엔 권력형 게이트를 다룬 범죄액션영화 ‘마스터’에서 신젬마로 또 다시 관객과 만난다.
“캐릭터로 연기하지만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슈를 대변하고 환기시켜주는 면이 뿌듯하다. 배우가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이므로 그런 역할이 올 때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감갈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다.”
사진=메가박스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