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우(47) 감독은 ‘주유소 습격사건’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 ‘선물’ 각본, ‘쏜다’ ‘연가시’ 연출을 해온 충무로의 명성자자한 스토리텔러다. 그가 재난 블록버스터 ‘판도라’(12월7일 개봉)로 돌아온다. 영화는 역대 최대 규모의 강진에 이어 원자력 폭발사고가 발생한 재난상황에서 발전소 직원 재혁(김남길)과 동료들의 목숨을 건 사투를 담았다.

 

 

- 언론시사를 통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언론과 평단의 반응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였나.

▲ 많이 욕먹는 스타일인데 걱정했던 것보다 과분하게 호평이 나왔다. 언론배급 시사가 저희 영화의 변곡점이 될 거다. 초기에 직접적으로 표현할지 에둘러 할지 고민했으나 유불리를 따지기보다 용기 있게 명확히 이야기하기로 결심했다. 시사 후 “재난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말씀이 나와서 다행이다.

- 451만 관객을 모은 ‘연가시’(2012)에 이어 두 번째 재난영화다.

▲ ‘연가시’는 예산이 넉넉지 않아 힘들게 촬영, 한이 맺혔다. 상황이 좋아지면 원 없이 펼치는 영화를 해보고 싶었다. 당시 레퍼런스를 조사하다가 만약 우리나라에 재난영화를 만든다면 블랙아웃이랑 원전만 남았구나, 여겼다. 그런데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졌고, “우린 안전해”란 말에 그냥 넘어가더라. 문제의 심각성을 느꼈다. 대자본이 들어가야 하는 작품인데 누가 이 뜨거운 감자를 쥐겠는가, 싶어 포기상태였다. 안될 거라는 전제 하에 편하게 막 썼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썼다가 투자사에 건넸더니 반응을 보였다. ‘변호인’으로 시련을 겪어서 면역력이 생긴 NEW가 고민 끝에 결정해 다행히 시작할 수 있었다.

- 강진과 원전 문제, 컨트롤타워 부재, 권력암투, 대통령의 대국민담화와 비선 등 놀라우리만치 현실을 예측한 장면들이 즐비해 놀라웠다.

▲ 다른 영화였다면 통찰력·예지력 평에 쾌재를 불렀을 텐데 저희 영화가 그런 장르는 아니니까 오히려 겁이 났다. 처음 시나리오를 쓰던 당시, 오픈되지 않았을 뿐 공기나 사회 분위기가 이런 내용이 충분히 예상됐다. 재난이 영화 안에서처럼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무엇보다 지진이 희한할 정도로 재현돼 깜짝 놀랐다. 정치적인 부분은 일부러 많이 덜어낸 편이다. 대사와 상황이 디테일하게 나와서 더 맞닿아 있게 느끼시는 듯하다. 물론 세월호 참사를 경험했으니 연상되는 부분이 있을 테고.

 

 

- 올해 ‘부산행’ ‘터널’ 등 재난영화가 많이 개봉됐고 대중의 관심을 끌었기에 ‘또 하나의 재난영화’란 레테를 달고 싶진 않았을 것 같다.

▲ 재난영화의 뻔한 이야기 전개 방식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과거 재난영화에 대한 개인적 불만이 왜 이런 재난이 벌어지는지, 사실에 입각한 논리 설명 없이 ‘재난 일어났다고 치고 봐’ 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러닝타임 2시간 내에서 시간 할애하기가 힘드니까 그랬으리라 이해는 하나 ‘판도라’는 무엇보다 사실성, 상황에 대한 정보나 과학적인 근거가 명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영화를 보노라면 실제 원전사고 한복판에 있는 듯한 현장감과 리얼리티가 빼어나다. 자료조사부터 방대했을 것 같다.

▲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끝까지 힘 있게 갈 수 있으려면 사실성과 현장감이 필수였다. 스태프에게 했던 첫 일성이 “이 영화의 관건은 ‘원전을 어떻게 빌려서 찍었을까’란 궁금증을 갖게 만들어야 한다”였다. 원전 관련 정보는 검색과 책, 동영상, 사진, 문서 등을 통해 취합했고 원전의 문제점을 지적해온 전문가들을 인터뷰하고, 원전 종사자들로부터 조심스럽게 정보를 얻었다. 몇 년 전 후쿠시카 원전사고 자료들도 도움이 됐다. 관객이 봤을 때 너무 어렵지 않은 수준으로 전문성과 원전구조를 정확히 짚어주고 싶었다.

- 무력한 젊은 대통령(김명민)과 노회한 실세 총리(이경영)의 대립을 비롯해 청와대 안 디테일한 묘사도 눈에 띈다.

 

 

▲ 청와대의 경우 공개 자료를 기본으로 전직 비선관 등을 취재해서 관저 및 내부 구조, 대형사고가 발생했을 했을 때 조직 어떻게 개편돼서 현지본부가 운영되는지, 대피소와 도로 병목현상 등을 알아나갔다. 권력구조에선 처음엔 총리가 아닌 비서실장이었다가 당시 대왕(김기춘 비서실장)이 있었으니까 자체 검열 끝에 총리로 바꿨다. 누차 말하지만 ‘판도라’는 청와대나 권력의 문제를 비판하려고 하는 영화가 아니다. 다만 국민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할 줄 아는 대통령이 자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채 장벽에 갇혀 무능하게 돼버리는 모습이 이 영화에 필요했다. 재난을 겪으며 국민이 기대하는 대통령으로 표현되는 구조를 원했다.

- 예민한 사안을 다뤘기에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외압은 없었나?

▲ 한수원(한국수력원자력)은 우리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청와대도 다 모니터링하고 있어서 극중 인물 이름이 바뀌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정권 초기의 싸늘한 공기가 직간접적으로 감지돼 주변에서 “어쩌려고 이래?”라며 걱정하고 그랬다. 농담이 아니구나 싶었다. 불필요한 오해에 휘말리지 않도록 한수원, 원전반대단체 등과 의도적으로 거리를 뒀다.

- 재혁의 가족 구성원 배치가 인상적이기도 하다.

▲ 남편과 장남을 원전사고로 잃은 홀어머니(김영애)는 우리의 부모세대다. 국가와 정부에 대한 맹목적 신뢰를 지닌 채 불운을 팔자로 받아들이는 기성세대다. 재난을 겪으며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인물로 설정했다. 형수(문정희)는 젊은 부모세대다. 기성세대의 결정에 반발하다가 손주에 대한 헌신에 가슴으로 품는 인물이다. 청춘세대를 대변하는 재혁은 아이러니한 인물이다. 원전이 지배하는 삶의 터전을 떠나느냐 마느냐 갈등하다가 결국은 제일 마지막까지 남게 된다. 내 가족을 살리겠다는 가족애 때문이다.

 

 

- 신파 코드는 기존 한국 재난영화의 전형성을 따르면서, 버거움을 덜어내기 위한 코믹 요소를 배제한 점은 기존 문법에선 벗어나 흥미롭다.

▲ 위기에 처한 사람들의 정서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려내면서 내 얘기인 것처럼 몰입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왕이면 많은 사람이 봐서 몰랐던 사실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대책이 마련되도록 하기 위해선 관객수가 평점보다 더 소중했다. 완급조절이나 쉬어가는 용으로 유머 코드, 재밌는 인물을 넣고 하는데 아무리 가상의 현실이어도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상황에서 유머를 던진다든가 할리우드 재난영화처럼 쿨한 멘트를 날리는 건 내 정서엔 맞지 않았다. 영화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한테 예의도 아니고.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이 연일 극장 밖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관객이 이 영화를 꼭 관람했으면 하는 이유를 듣고 싶다.

▲ 원전 재난은 사고가 일어나면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치명적이고 피해가 매우 심각하다. 우리 영화가 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 현실의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면서 다음 세대에게 어떤 세상을 물려줘야할지 고민해 볼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사진 한제훈(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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