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사 대리 정지순. 진상+궁상+밉상으로 인해 일명 ‘개지순’으로 불린다. 10년을 해오는 동안 이 배우의 정체성으로 돼버렸다. tvN 장수드라마 ‘막돼먹은 영애씨’의 정지순(41)이 송구영신한다. ‘막영애’ 시즌 15를 떠나보내고 영화 ‘걱정말아요’(1월5일 개봉)을 맞이한다. 코믹한 진상 캐릭터에서 멜로에 빠진 순박한 성소수자로 광폭행보를 벌이는 그를 만났다.
■ 퀴어영화 ‘걱정말아요’ 멜로 도전
누군가와의 특별한 만남을 소재로 한 퀴어 독립영화 ‘걱정말아요’는 3편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옴니버스물이다. 정지순은 첫 번째 에피소드 ‘애타는 마음’(감독 소준문)에서 욕망에 사로잡힌 순박한 택시기사 춘길로 등장한다. 헛헛한 마음에 나선 심야 종로길에서 바람난 동성 애인을 추적하는 게이청년 현준(이시후)을 만나 벌어지는 소동극이 20분간 이어진다.
“감독님이 ‘막영애’에서 변태적인 눈빛을 봤대요. 소속사가 없다보니 트위터를 통해 프로듀서로부터 출연 제의가 왔죠. 성 소수자 이야기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살짝 부담이 됐어요.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혹시 노출이 있느냐’고 물어봤고요. 몸매에 자신이 없는데다 다들 좋아하지 않을 거란 걱정이 앞서서요.(웃음) 일반적인 퀴어영화는 동성간의 사랑이라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는데 ‘애타는 마음’ 시나리오는 재밌었어요. 특히 저 같은 배우들은 멜로에 출연하기 힘든데 좋았죠.”
상대 배우를 여자로 상상하며 연기할까도 생각했다. 쉽게 가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러면 정지순이 묻어나올 것 같아 ‘춘길이 왜 동성을 좋아하게 됐을까’를 상상하면서 듬직한 춘길 캐릭터에 숨결을 불어넣어 갔다. 영화 속 정지순은 남자의 허벅지를 슬쩍 만지고, 립스틱을 바르고, 영어제목(I’m Horny)처럼 달뜬 욕정을 생기 넘치게 드러낸다.
“춘길은 배시시 웃는 샤방한 남자를 좋아해요. 친구 없는 왕따이다 보니 TV 속 환하게 웃어주는 미소년을 보면서 끌리지 않았을까 여겼어요. 보통 남자를 볼 때와 꽃미남을 볼 때 다른 느낌을 강조하며 차근차근 접근해 갔어요.”
■ "노출만 없으면 퀴어물 또 출연하고파"
아주 오랜만에 출연한 영화라 기쁜 한편 낯설었다. 더욱이 ‘막영애’와 달리 대사가 극도로 절제됐다. 눈빛과 표정, 내레이션으로 표현해야 했다. 또한 상대역인 나이 어린 배우와 호흡을 맞추는 점이 만만치 않았다. 연극배우 시절처럼 자주 만나고 술도 마시면서 소통하지 못한 채 불과 3~4일 만에 일사천리로 촬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 겨울 삼사일이 행복했어요. 연극할 때처럼 인물에 대해 상상하고, 표현에 대해 연구하면서 여러 가지로 표현이 가능했으니까요. 이번에 종로3가 성소수자 인권단체 친구사이에서 리딩을 하고 남산, 종로3가, 소월길을 다니고, 게이 엑스트라 배우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백프로 이해는 못했겠지만 그들 역시 똑같은 사람임을 느꼈어요. 당당함에 매력을 느꼈고요.”
‘애타는 마음’에 대해 그는 “훅 들어오는 사랑이야기가 아니라 귀여운 로맨스를 보여준 듯하다”며 “‘걱정말아요’는 입문용 퀴어영화”라고 소개했다.
“퀴어영화 출연 제의가 또 들어온다면 역시 물어볼 것 같아요. 벗는지 여부를요. 하하. 일반 드라마에서도 그러거든요. 제 몸에 자신감이 없어서. 잘려나간 편집분에 대한 아쉬움이 있어서 장편 퀴어영화에 꼭 출연해보고 싶어요.”
■ ‘막영애’ 10년 출연하며 결혼 출산
2007년 ‘막영애’ 시즌2에 합류했으니 10년 동안 한 드라마를 해온 셈이다. 시즌 11부터 합류한 라미란 이승준보다 훨씬 오래 된 개업 공신이다. 정지순 대리를 연기하며 결혼했고, 세 아이를 출산했고, 부유하지는 않으나 생계를 꾸려왔다. 작품뿐만이 아니라 동료 배우, 작가, PD들과는 가족과 같은 사이가 됐다. ‘막영애’는 배우 정지순에게 최적의 드라마이자 인생작이다.
“10년이나 할 줄은 저도 몰랐어요. 가족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지내와 출연료를 못 받더라도 계속 모여서 하고 싶어요. 처음엔 댓글에 전부 제 욕이었어요. ‘개지순’ 소릴 들으면 솔직히 기분이 나빴고요. 그런데 시청자들도 계속 보면서 정이 들었나봐요. 시즌 11에서 (김)산호랑 잠깐 빠졌을 땐 다시 부르라고 난리가 났나봐요.”
시즌 15에서 정지순은 비극의 주인공이 됐다. ‘아내바보’ ‘딸등신’으로 행복하게 살았던 그가 출생의 비밀 탓에 이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이번 시즌 들어갈 때 미리 말해주면서 미안해 하더라고요”라며 “등장인물들이 다 착해지니까 정지순을 혼족으로 만들어 다시 나쁜 짓을 시키려는 구상인 것 같다”고 귀띔했다.
“처음엔 이렇게 세지는 않았어요. 술 마시는 자리에서 감독님이 살아온 이야기를 물어보기에 솔직하게 말했는데 제 말투랑 라이프스타일을 캐치해서 극대화시킨 듯해요. 연극할 때라 돈이 없는 걸 구두쇠로 만들어버리고. 시즌이 지날수록 업그레이드됐죠. 나중엔 고철 주우러 다니는 등 더 세졌어요. 심지어 평상 시 술 먹으러 가면 옆 테이블 손님이 불쌍한 눈빛으로 소주 1병을 쏘기도 하고, 만둣국을 먹었더니 60대 어르신이 대신 돈을 내주고 가시기도 하고요.”
■ 무명 연극배우, ‘모여라 딩동댕’ 멀티맨 각광
광신고에서 연극반 활동을 했다. 졸업 후 95년부터 대학로에서 연극배우로 활동했다. 군 제대 후 인천으로 내려가 공연을 계속 했다. 정부 지원금을 받은 작품들에 출연하면서 근근이 생계는 꾸려갔다. 6개월간 아동극에 출연했는데 우연히 마주친 객석 아이들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허투루 하지 말자란 생각이 불끈 치솟았다. 그래서 2000년 EBS 어린이 프로그램 ‘모여라 딩동댕’ 오디션을 보고 출연하게 됐다.
“이 프로그램도 무려 7년 동안 해서 선배들이 ‘공무원’이라고 놀려댔어요. 이병준 선배가 악역 번쩍맨을 맡았고 저는 곤충과 사물을 연기했어요. 무당벌레, 닭, 오리, 개, 우산 등등 안 해본 게 없었죠. 무슨 역할이든 제가 만들어가는 게 좋아요. 사람으로 태어나서 우산 역할까지 했으니. 아무튼 되돌아 보면 밑바닥부터 조금씩 조금씩 올라온 것 같아요.”
2007년 초 MBC 베스트극장 ‘드림워즈’에 주연으로 캐스팅됐다. 꿈을 꾸면 달라지는 5명의 이야기를 다룬 이 작품에서 잠을 자면 포악해지는 착한 은행원 역을 맡았다. 당시 ‘막영애’ 시즌 2가 들어갈 무렵이었고, ‘곰처럼 생겼는데 속은 여우같은 남자’를 찾던 막내 작가가 이 드라마를 보고 추천해 ‘막영애’에 합류하게 됐다.
“성격이 내성적이고 낯을 가리는 편이에요. 타인에게 피해주는 것도 질색이고요. 진짜 독고다이로 운 좋게 살아남은 것 같아요. 지난 10년간 개지순 이미지로 살아왔지만 깨어있는 감독님들이 저의 또 다른 얼굴을 봐주시고 캐스팅해줄 거라 낙관해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사진=지선미(라운드테이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