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하늘이 정유년 새해를 뜨겁게 껴안았다. 지난해 드라마 ‘공항 가는 길’로 섬세한 심리 세공술을 보여준데 이어 치정멜로 ‘여교사’(감독 김태용)에선 짙은 어둠과 연민을 아로새겼다. 개봉일인 4일 오후 국립현대미술관 옆 카페에서 연기 마스터 향을 솔솔 풍기는 그녀와 함께했다.

 

 

- ‘여교사’를 선택할 때 많이 불편했다고 들었다.

▲ 시나리오는 재밌게 봤는데 작품의 느낌이 많이 불편했다. 효주 캐릭터를 연기할 걸 생각하니 모멸감까지 들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연기하고 싶지 않다가 컸다. 지난 20년 동안 달달한 로맨스의 사랑받는 연기를 주로 했다. 물론 공포, 스릴러도 했으나 그건 장르의 다른 면이었는데 이건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다는 느낌이 컸다. 비록 연기지만 느끼고 싶지 않은 감정이라 망설였던 거다.

- 드라마 ‘로망스’(2002)로 ‘국민 여교사’ ‘첫사랑 여교사’ 이미지를 깨는 데 아쉬움은 없었나?

▲ 전혀. 내가 했던 작품들 속 이미지를 인위적으로 깨고 싶지는 않다. ‘로망스’를 좋아했던 팬들에게는 배신이었겠으나 낯선 캐릭터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과 설렘을 동시에 느꼈다.

- 유부남과 불륜에 빠져드는 ‘공항 가는 길’, 남자 제자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하는 ‘여교사’...연이어 변신이란 소리를 들을 법하다.

▲ 사실 ‘공항 가는 길’도 연장선이었다. 멜로였고, 감성적으로 표현하는 거였으니까 선택했던 거지 불륜이 부각됐다면 고르지 않았을 것 같다. 여주인공 아를 통해 부분으로 감성의 결을 보여줄게 많아서였다.

- 정규직 교사 혜영(유인영)과 비정규직 교사 효주 사이를 오가는 무용특기생 재하(이원근)를 바라보는 효주의 감정을 어떻게 생각했나?

▲ 효주가 재하에게 빠져드는 방향과 속도가 감독님과 좀 달랐다. 의문이 들어 계속 질문했고 감독님이 나의 의견을 많이 수용해줬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던 효주에겐 단 하나의 희망은 정규직 교사가 되는 거다. 팍팍한 현실에서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을 거다. 그런데 자극적인 게 등장하니 세포들이 살아나는 느낌이 들었을 거다. 열린 선생의 마음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이상한 느낌으로 가다가 소용돌이에 빠져버리는 감정선이 아니었을까. 배우로서 그런 쪽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 김 감독은 당신의 캐스팅에 대해 백퍼센트 만족감을 표시했다.

▲ 첫 미팅 때 너무 궁금해서 “왜 저를 캐스팅하셨어요”라고 물었다. 내가 ‘힐링캠프’에 출연했을 때 무심결에 보였던 착 가라앉은 무표정함에서 효주의 모습을 캐치했다고 하더라. 본인이 끄집어내주고 싶었다고도 했다. 내가 미처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해준 데 기분이 좋았다. 그간 슬프거나 사랑스럽거나 밝고 코믹한 연기를 할 때 표정과 눈빛에서 항상 마음을 발산하는 연기를 했는데 그냥 가만히 있는 모습에 시선을 꽂았다는 게 신선했다.

- 왜 과거에도 ‘로코 퀸’으로서 사랑스러운 모습뿐만 아니라 서늘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 않았나.

▲ 맞다. 그런데 이번 기회에 나의 무표정함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됐다. 새벽에 커피를 마시다 재하의 등교를 무표정하게 보는 신이 있는데 내 감정대로 연기했다. 스태프들이 그 커트를 너무 좋아했다.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있어도 내게 이런 표정이 나오는구나 싶어 신기하면서도 힘이 됐다. 일상 속 무표정한 모습을 효주의 감정으로 가져오니 특별한 색깔이 나온 것 같다.

- 여교사 효주와 배우 김하늘은 많이 다른가?

▲ 정말 다르다지만 굉장히 이해가 됐던 부분이 열등감, 자격지심, 질투였다. 나도 경험한 거니까.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없어졌으나 어릴 때는 실체를 잘 모른 채 내면에 간직했던 감정 아닌가. 그럼에도 대처하는 방법은 너무 다르다. 나 같으면 둘 중 하나다. 혜영과 친하게 지내거나 완전히 외면했을 거다. 또 난 자존감이 상처 입을 때 굉장히 표현하는 편이고 포기해야 는 순간에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다른 걸 찾는다. 단순하고 심플하다.

 

 

- 임팩트 강한 신들이 꽤 많다. 어떤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나.

▲ 재하와 대화를 나눈 뒤 혜영을 찾아가 얘기 좀 하자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다. 그때의 절박한 눈빛이 너무 나 같지가 않았다. 정말 효주의 느낌이었다. 그 시퀀스를 좋아한다. 또 하나를 꼽자면 차를 타는데 혜영이 “재하 정말 사랑한 거 아니지?”라고 물을 때 “허억~”하는 대답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만이 내밀하게 알아채는 느낌이 있었다.

- 오늘 인터뷰에서 ‘감정’이란 단어를 참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만큼 감정을 여러 형태로 다뤄야만 했던 작업이었음을 직감하게 한다. 이번에 특히나 힘들지 않았을까 싶다.

▲ 다행히 결혼 직전 사랑을 많이 받으며 감정적으로 굉장히 행복한 시기여서 너무 다행이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시기였다면 너무 힘들어서 이 연기를 못했을 거다. 감정표현 방법을 잘 몰랐을 땐 슬픈 감정을 써야할 경우 미리 슬픈 음악을 듣거나 슬펐던 기억을 떠올리며 감정을 계속 유지했다. 연기 노하우가 생긴 이후엔 그러면 체력, 감정이 소진돼 막상 집중해야 할 때 감정이 흐트러져버린다. 그래서 중요한 감정 신을 찍기 전엔 카메라가 켜지기 전까지 굉장히 밝게 있다가 순간 몰입해서 정확하게 표현한다.

- ‘공항 가는 길’ 이후 ‘제2의 전성기’라는 표현이 쏟아지고 있다.

▲ 드라마 ‘온에어’ 때 ‘제2의 전성기’ 칭찬을 많이 들었으니 엄밀히 말하면 ‘제3의 전성기’ 아닐까. 후후. 그 때가 서른 넘어가던 무렵이었다. 스무 살부터 연기를 해 와서 그 말을 듣곤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금 ‘제2의 전성기’ 소리를 들으니 앞으로가 매우 희망적이고 더 자신감도 생긴다. 그러고 보니 10년 주기로 그런 수사를 듣는 듯하다.

 

 

- 1996년 데뷔했으니 20년을 꽉 채웠다. 배우 김하늘에겐 어떤 변화의 포물선이 그려져왔나.

▲ 데뷔했을 땐 여리여리하고 청순, 청승맞은 연기를 했다. 그런 캐릭터들이 연이어 주어졌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코믹하고 당찬, 캔디지만 본인이 이끌어가는 캐릭터가 들어왔다. 중간에는 ‘온에어’의 오승아처럼 싸가지 없고, 자기 할말 다하지만 사랑받는 캐릭터를 했다. 그리고 수아와 효주를 맡게 됐다. 점점 변화해 왔다.

- 당신에게 수아와 효주는 어떤 존재인가.

▲ 나를 성숙하게 만들어준 캐릭터들이다. 효주의 경우 제일 아픈 손가락이다. 다른 역할들은 외로운 인물들도 있었지만 결국은 뭔가를 해내고 깨쳐 나오는데 효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게 안타깝기 때문이다. 아직도 감정적으로 효주한테 많이 빠져있어서 스틸만 봐도 마음이 아려온다. 시간이 지나도 아픈 손가락일 친구다.

- 배우는 표현하는 직업인데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나.

▲ 작품 속 모든 주인공이 관객에게 이해되고 공감 가야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가 하는 주인공들은 이해, 설득, 공감이 가야한다고 생각하며 연기하고 있다. 그래서 수아도 설득력 있게 연기해내고 싶었고, 부모와 친구조차 보이지 않는 효주도 그녀의 안타까움과 연민을 표현하고 싶었다.

 

사진=외유내강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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