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리고 날카로운 이미지가 공존하는 배우 권기하(25). 5일 개봉한 옴니버스 퀴어 독립영화 ‘걱정말아요’의 ‘새끼손가락’ 에피소드에서 인권단체 청년 직원 혁으로 뚜벅뚜벅 걸어온다. 과거 아프게 헤어졌던 연인 석(박정근)과 현재의 헌신적인 애인 준(이준상) 사이에 선 캐릭터다.

 

 

■ 남자버전 ‘최악의 하루’

권기하에 따르면 ‘새끼손가락’의 혁은 영화 ‘최악의 하루’의 여주인공 은희(한예리)와 비슷하다. 하루 동안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끔찍했던 과거를 옛 연인을 통해 마주하게 되고,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피하고 싶은 상황에 놓이게 되는 점에서 그렇다.

“혁은 본인 자체의 중력이 모자란 친구예요. 다른 인물들로부터 중력을 얻어야만 설 수 있고, 관계 속에서 존재를 증명하는 불완전한 캐릭터죠. 자신뿐만 아니라 석에게도 상처를 준 뒤 준을 만나 평온을 얻게 되죠. 중력이 부족한 예술가들이 많잖아요. 배우도 중력을 갈구하는 직업이고요. 그런 면에서 혁을 이해했다고 생각했죠.”

혁을 바라보는 권기하의 시선은 물기가 촉촉하다. 너무 어리고 불안정했고, 자신보다 더 서툰 친구라는 점 때문이다.

“자신이 걸린 병에 대한 두려움, 석에 대한 마음이 진심이었기에 떠나갔을 거예요. 한편으론 자신의 불안정함을 보듬어줄 수 있는 준 같은 인물이 필요했을 거고요. 혁이 언제쯤 중심을 잡을 수 있을지 , 불안정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안쓰럽고 걱정돼요. 저도 삶의 불안정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 예술가 부모 아래 성장...미술에서 연기로 터닝

원래 그림을 그렸던 권기하는 경기대 애니메이션학과에 입학했다가 중간에 학업을 접었다. 시나리오 작가 겸 연극 연출가인 아버지(권재우)와 뮤지컬배우 출신 어머니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연기에 대한 관심이 싹텄다.

 

 

유년기부터 그의 집에는 배우 '아줌마' '아저씨'들이 몰려들어 나누는 소리와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예술의 향내가 공기를 형성했다.

“대학시절에 공연 보고, 연기과 강의를 청강도 했는데 멋있고 재밌더라고요. ‘나도 저거 해볼까’란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어요. 하면 할수록 적성에 맞고 흥미로웠죠. 열심히 하면 잘 할 수 있을 거 같아서 계속 하는 중이에요. 제가 관심과 사랑이 많이 필요한 사람이라 이 작업이 좋고, 다른 삶을 이해하는 것도 너무 재밌어요.”

 

■ 2011년 데뷔...출연작 무려 100편

‘그대 잠든 사이’ ‘그대와 춤을’ ‘푸른 날’ ‘물보다 진한’ ‘삶은 계란’ ‘치킨’ ‘폭력의 틈’ ‘급식실 오디세이’ ‘하숙집’...단편·장편, 독립·상업영화 등 무려 100편에 출연했다.

인터넷에서 오디션 다 찾아서 메일 보내고 극단 기획사 등등에. 레슨도 짧게 두달 정도 받고. 그때 감을 익힌 뒤 단편영화 찍으면서 중간중간 좋은 감독님들 만나서 수련받았고. 리딩 리허설 반복해가면서. 연기레슨을 2개월가량 짧게 받으며 감을 익힌 뒤 2011년부터 단편영화에 출연하며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터넷으로 극단, 기획사 오디션을 몽땅 찾아내 e-메일을 보내 출연편수를 늘려갔다.

중간중간 젊고 역량 있는 감독들을 만나 수련을 받고, 리딩 리허설을 반복하며 경험을 차곡차곡 쌓았다. 2012년 ‘어린 엄마’로 국내 청소년 영화제의 부름을 받았다.

 

 

■ 이스라엘 감독 리오 샴리즈 페르소나

지난 2015년엔 이스라엘의 실험영화 감독 리오 샴리즈의 ‘공백의 얼굴들’에 캐스팅돼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초청 받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권력관계를 동성 연인에 투영시킨 문제작이다.

연이어 샴리즈 감독의 신작 ‘더 케이지’의 주인공 앨런 역을 맡았다. LA 한인폭동에서 모티프를 얻은 이 영화는 가상의 나라 2군데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대만과 한국에서 촬영이 이뤄졌다. 앨런은 성 정체성이 유동적인 인물이다. 남자, 여자, 게이, 바이 섹슈얼일 수도 있는 열린 캐릭터다. 올해 2월 열리는 베를린영화제 초청이 유력시되고 있다.

“2013년 감독님이 내한했을 때 필름메이커스에 공고가 나와 오디션에 지원해서 인연을 맺게 됐어요. 지난해에도 방한했는데 저를 염두에 두고 ‘더 케이지’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하셨고요. 밝고 사랑스러운 에너지가 좋았다고 하시더라고요.”

 

■ 퀴어영화 10편째 출연

김남길, 이제훈, 연우진, 한주완, 이이경, 곽시양, 이재준 등 수많은 청춘스타들이 퀴어영화에 출연하며 스타반열로 발돋움했다. 권기하는 ‘아! 개운해’ ‘할 말은 거기 없었네’ 등 대략 10편의 퀴어영화에 출연했다. ‘친구사이’ 신인감독들 프로젝트에 출연하면서 출연작이 급격히 늘었다.

“이성과의 로맨스를 제대로 찍어본 적이 없어요. 수줍게 지켜보기만 하거나, 짝사랑하거나 퀴어 로맨스만 했었어요. 전에는 ‘새끼손가락’의 석과 비슷한 역할을 많이 했죠. 이번엔 해보지 않은 역할이라 주저 없이 했던 것 같아요. 새로 받는 퀴어영화 시나리오는 웬만해선 전에 다 해봤던 캐릭터들이라 더디게 하고 있는 듯해요.”

 

 

“동성애자 연기를 하건 이성애자 역할을 하건 상대와 사랑하는 부분에 있어선 별반 불편을 느끼진 않아요. 인간 누구나 자신의 성 정체성에 따라 사람에게 설레며 흥분하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니까요. 이번 '새끼손가락'에선 정확하게 연기하는 데 포커스를 맞췄어요. ‘너무 정확하게 보여줬나?’란 후회가 살짝 들기도 하지만 뭉뚱그리지 말자가 목표였죠. 전까진 뭉뚱그려 표현해 관객에게 해석할 수 있게끔 했거든요.”

 

■ “유아인 롤모델...정치적으로 올바른 로코 찍고파”

롤 모델로 배우 유아인을 꼽는다. 사회와 세계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다. 그처럼 활동하면 멋있을 것 같단다.

“예술가로서 작업을 해나가는 점, 작품 선택도 자기의 연기 욕심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점이 부러워요. 해보고 싶은 연기는 로맨틱 코미디예요.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찍고 싶어요. 로맨틱 코미디를 보면 남주들이 하면 안 되는 행동을 많이 하고, 차별의 말들과 행동이 멋있게 포장되곤 하는데 나쁜 걸 미화시키지 않은 연기를 보여주고 싶어요.”

프랑스 배우 드니 라방 주연의 ‘홀리 모터스’처럼 다양한 연기법이 필요한 작업을 원한다. 실험영화를 많이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시나리오와 연출에도 관심이 많다. ‘컷’과 ‘편집’에 대한 이해를 하고 연기하는 걸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걱정말아요’에 대해 권기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라며 “3편의 에피소드 엔딩에서 느낀 건...비록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아간다. 그러니 걱정 말아요가 아닌가 싶다”고 속삭였다.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