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가 주목하는 젊은 감독 김태용이 30대에 진입하며 ‘여교사’(1월4일 개봉)를 꺼내 들었다. 두 여교사와 한 남학생의 치정 멜로다. 자신의 20대에 이별을 고하는 작품인 것 마냥 깊고도 진한 향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열등감, 질투, 의심 등 어두운 감정을 쓸어담은 영화는 그의 작품이 그렇듯 금기의 관계를 맹렬하게 뒤흔든다. 뱅헤어에 깊이 팬 보조개, 똘망똘망한 소년 같은 감독이 나타났다.

 

 

- 왜 치정 멜로인가?

▲ 성장기부터 이어져온 나의 고민, 관심사, 탐구를 세 남녀의 치정 멜로에 대입했던 것 같다. 관객에게 호기심을 주는 영화로 만들고 싶은 생각이 있었다. 앞으로 더 큰 장르영화를 해야겠지만 개인과 사건을 따라가다 보면 끝에서 사회 시스템과 맞닥뜨린다. 국정농단 게이트도 태블릿PC 한 대로 시작했듯이 불씨가 무섭다. 효주(김하늘)의 사소한 열등감이 파국을 만드는 게 감독으로서 흥미로웠다.

- 청춘 남자의 내밀한 심리에 능한 감독으로 여겼는데 ‘여교사’에서 여성의 심리를 밀도 높게 그려낸 느낌이다.

▲ 여성의 심리를 그리려고 시작한 건 아니고 자존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 특히 교육현장에 계급문제가 첨예한데 많이 묻혀있어서 자연스럽게 확장이 됐다. 궁극적으로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여자들의 심리라든가 여성 직장인 이야기는 자료 조사와 친구들의 경험담에서 도움을 받았다. 친구들은 대부분 직장 5년차다. 계약직 교사도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 또한 김하늘 선배도 데뷔 20년차의 여배우고 제작자, 조감독이 모두 여자라 많은 이야기를 들으려고 귀를 열어놨다.

- 소년의 가슴 찌릿한 성장기인 ‘거인’, 30대 여성의 성장과 파국의 드라마 ‘여교사’는 닮았으면서도 다르다.

▲ ‘거인’의 확장된 이야기라는 평이 가장 좋았다. 두 작품 모두 내가 투영되지 않을 수 없을 테고, 비슷한 지점을 많이 봐줘서 오히려 고마웠다. 두 작품의 이야기, 관계성, 세계 등을 잘 지켜준 거 같아서 언론시사 끝난 뒤 투자배급사에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 여교사를 연기한 김하늘 캐스팅에 대한 변을 들려준다면?

▲ ‘거인’의 최우식처럼 기존에 보이지 않았던 이미지를 끄집어내 관객에게 놀라움을 주는 카타르시스를 즐긴다. 내가 만든 영화의 가장 빛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김하늘씨의 경우 ‘로망스’ ‘신사의 품격’ ‘동갑내기 과외하기’ 등 밝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국민 선생님 이미지를 확 뒤집어 이 배우가 가진 깊고 어두운 절망적 속내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이미지를 한 번도 소비하지 않았던 배우이기에 더욱 혹했다. 김하늘이 열등감, 질투를 느낀다? 퀘스천이 재미났다.

- 2002년 드라마 ‘로망스’와 2017년 ‘여교사’의 김하늘은 연하의 제자와 로맨스를 만들어내지만 많이 다른 질감이다.

▲ 같은 교사이지만 20대 초반과 30대 중반의 선생님을 연기하는데 있어 달라진 사회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지금 교단에는 어떤 문제가 있고, 선생이란 직업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다루는 게 흥미로웠다. 비슷한 연배의 손예진(비밀은 없다), 김민희(아가씨), 공효진(미씽: 사라진 여자)과 같은 여배우들이 제2의 시기를 거치며 성숙해지고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하는 시기라 김하늘 선배도 당당히 합류하기를 바랐다.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마더’의 국민엄마 김혜자 선생님의 반전 얼굴을 이번에 관객들이 체험할 거다. 그리고 감탄하지 않을까.

- 금수저 여교사 혜영 역 유인영은 다시 악녀 연기인데 악녀의 전형성에 가두기는 힘들어 보인다.

▲ 유인영 선배는 한때 최우식과 같은 소속사에 있어서 친하게 지냈다. 선배의 작품들을 챙겨서 봤는데 “드라마에서 한 악역들은 직업이 없었다”는 말에 가슴이 아팠다. 처음으로 직업이 생겨 일을 하는 금수저다.(웃음) 드라마가 소비하는 방식이 배우의 욕심에 비해 적었단 아쉬움이 들었다. 따뜻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라 정서적으로 많이 의지했다. 혜영은 악역으로 읽히는 부분도 있으나 이제까지의 평범한 악역은 아닌 듯하다. 자존감이 높은 여성이며 원래 악의가 있는 게 아니라 나약하다보니 상황에 따라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욕할 수 없는 캐릭터로 받아들여지도록 만들려 했는데 이 배우가 참 잘했다.

 

 

- 항간에는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비교하기도 하더라.

▲ 정유라가 페북에 “돈 많은 부모를 둔 것도 능력이다”란 말을 했는데 정유라나 혜영이나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을 것 같다. 자기가 가진 걸 알게 되면서 권력욕이 발동했을 거라고 본다. 혜영은 효주(김하늘)에게 열등감을 가지면서 자기가 가진 걸 깨닫고, 효주를 밟고 싶어서 절망으로 몰아넣는 인물이다. ‘여교사’는 한편으론 금수저의 성장기일 수도 있다. 여성관객에게 공감을 살 수 있는 캐릭터라고 자부한다.

- ‘거인’의 최우식과 ‘여교사’의 이원근은 묘하게 이미지가 포개진다.

▲ 둘 다 정식으로 연기를 배우지 않았고. 비슷한 이미지를 갖고 있다. 신인답지 않게 나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이원근이 이번에 연기 잘했단 소리를 들어서 참 다행이다. ‘거인’ 이상으로 좋은 배우를 발견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예쁘장한 꽃미남 역 때문에 연기가 잘 안 보여 아쉬웠다. 그의 모호함은 10대 아이 같았다. 극중 무용특기생 재하의 알 수 없는 속내와 유사했다. 섹슈얼한 이미지보다 ‘남자 김고은’ 같이 일상적인 매력이 있는 캐릭터에 잘 맞는다.

- 그런 유형의 남자배우들을 선호하나?

▲ 배우가 감독을 무서워하는 순간부터 연기가 반도 안 나온다. 수평적 관계가 됐을 때 나오는 시너지가 굉장한데 그런 장점이 있다. 난 미남보다 류준열 이동휘 박보검 같은 일상적 매력의 연기자를 좋아하는데 최우식 이원근도 그런 부류다. 배우의 눈은 여러 가지가 있다. 둘의 눈은 매우 작은데 사랑스러우면서 거칠고 비릿한 느낌이 있다.

 

 

- 김하늘이 언급한 바에 따르면 촬영 현장에서 여주인공보다 이원근에게 더 많이 주문하고 신경을 쏟았다고 하던데.

▲ 배우로서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자존감을 높여주는 게 중요한 요소였다. 기교를 누르고 진정성 있는 연기가 필요해서 원근이에게 신경을 많이 썼다.(웃음) ‘여교사’가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었는데 이후 ‘그물’에선 더 잘했다.

- 인물들 사이를 관통하는 ‘모성’이란 키워드를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내가 20대에 연애할 때 사랑인지 모성인지 항상 헷갈렸다. ‘여교사’에서도 관계를 혼동시켰다. 효주가 모성으로서 재하에게 다가가는 건지 이성으로서 다가가는 건지, 재하는 혜영을 모성으로 보고, 어머니 없는 혜영은 효주를 모성으로 보는 등 ‘애정의 먹이사슬’이란 말도 들었다. 모성의 관통을 의도하진 않았으나 30대가 돼서도 내겐 모성이 강렬하게 남아 있다.

- 지난해 말 초청 받은 하와이 국제영화제 현장 반응은 어땠나?

▲ 사제간 스캔들은 흔한 일들이라 그걸 벗기고 장르영화, 서스펜스물로 보더라. 특히 혜영 나올 때 반응이 좋았다. 일상의 계급관계가 주는 스트레스가 극대화됐을 때 공포로 전환되는 구조를, 장르적 쾌감을 느끼면서 봤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우리 사회에는 불편한 금기가 많으니까 그걸 통과하느냐 마느냐가 관건이지 싶다.

- 새해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어나갈 계획인가.

▲ 우리가 무디게 생각했던 편견이나 의식이 보여지는 영화가 좋은 작품이라고 여긴다. 그런 기준점을 간직한 채 작품을 만들려고 한다.

 

사진 지선미(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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