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저녁 집에 오는 길에 가지에 움튼 싹을 봤습니다. 늘 지나던 골목의 목련이었는데 거칠게 말라있던 가지마다 아주 작은 것이 달라붙어있는 겁니다. 매년 반복되는 일인데 왜 새싹의 첫 순간은 언제나 낯설고 놀라울까요.

나무는 앙상하게 마른 가지에 눈길 한 번 준 적 없는데 누구보다 먼저 봄소식을 알립니다. ‘봐주지 않아도 묵묵히 제 할 일 하기’ 수행은 아마 식물이 최고로 잘 할 겁니다. 계절을 알리는 자연의 시그널이 울리고 있습니다. 살짝 땀나게 산책하고 들어와서 책 한 권을 골랐습니다. 헨리 데이빗 소로(1817-1862)의 ‘월든’입니다.

 

 

분량이 적지 않습니다만, 저는 ‘월든’을 책이 아니라 시로 읽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가 유려하고 함축적이냐고요? 원서를 읽어본 적 없어서 거기까진 알 수 없고요(쿨럭). 당연히 산문집임에도 제게 시처럼 다가온 까닭이 있습니다. 형식도 주제도 없이 묵묵히 그날그날 숲에서 일어나는 별의 별 해프닝과 단상들을 적어내려가기 때문입니다. 계절의 흐름에 철저히 의존해서 쓰여진 책이니 시간을 따라 쓴 서사시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아시겠지만 책에는 명문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소로가 스물일곱 살에 월든 호숫가에 들어가 통나무집을 짓고 밭을 일구면서 2년 동안 자급자족한 내용이 담겨있지요.

 

 

씨를 뿌린 다음에는 대개 샘터의 그늘에서 한두 시간을 보내면서 점심을 먹고 책도 읽었다. 그 샘은 내 밭에서 반 마일 떨어진 부리스터 언덕 아래에서 스며나오는데, 자그만 늪과 개울의 근원이 된다.

우리 선조들의 안분지족의 삶과 다를 바 없이 평화로운 풍경입니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소로는 책 두어 권만을 들고 숲으로 들어갔다는 것이고 우리는 집 지을 땅과 돈을 마련하기 위해 자연을 더욱 훼손하고 나서야 자연으로 돌아갈 생각을 한다는 겁니다.

탐욕과 이기심 때문에 그리고 토지를 재산으로 보거나 재산 획득의 주요 수단으로 보는 천한 습성 때문에 자연의 경관은 불구가 되고 농사일은 품위를 잃었으며, 농부는 그 누구보다 비천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

 

 

소로는 평화로운 톤으로 자연을 예찬하는 한편 문명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책 곳곳에서 합니다. 하늘 아래 나를 구속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자주독립의 맹세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서른 안팎의 젊은 남자가 감자의 싹을 관찰하고 오소리와 안뜰을 나눠 쓰면서 별을 헤는 풍경은 참 뭐랄까요. 저는 속된 인간이라선지 대단한 한편 괴팍하게도 느껴집니다

 

이 책을 읽는 재미가 여기에 있습니다. 지극히 개인적 욕구에 충실한 시(詩)적 태도로 단단한 주장과 예리한 관찰과 분석을 들어가며 자주 흥분하고, 그때마다 독자를 선동하지만 그 태도가 굉장히 투박합니다. 

그래서 위대한 책입니다. 그리고 귀여운 책입니다. 자애와 포악이 공존하는 자연이라는 거대한 존재 아래에서 젊은 청년이 온 몸으로 경험한 성찰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역작이지요. 

자연을 노래하고 문명을 비판한 19세기의 걸출한 지성은 아이러니하게도 마흔 다섯에 결핵으로 삶을 마감합니다. 

'월든'은 환경론자가 아니어도 도전해볼 만한 책입니다. 숲 이야기라고 꼭 봄에 읽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만 나른한 계절에 읽기에 좋습니다. 읽다가 까무룩 졸아도 좋고, 깨어나 다시 펴들어도 금세 빠져들게 매력적입니다.

안은영 eve@slist.kr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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