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회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기생충’은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로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850만 이상 관객을 동원하며 장기 흥행을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영화의 분위기를 단번에 바꿔놓으며 보는 이들을 충격에 빠뜨린 주인공이 있다. 바로 이정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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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은은 ‘기생충’에서 박사장(이선균)네 가사도우미 국문광 역을 맡아 극 초반에 웃음을 담당했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극의 반전을 이끌어내는 중요 인물로 변신해 관객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그의 존재감은 관객들의 눈길을 끌었고 ‘기생충’의 흥행에 한몫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이 호사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가 연기한 문광이란 캐릭터를 보고 사람들이 두려워하거나 무섭다고들 하시는데 저는 귀여웠거든요. 그렇지 않아요? 실제로 연기할 때는 그렇게 소름끼치는 캐릭터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기생충’ 때문에 사람들이 저를 많이 알아보세요. 시간 지나다보면 거품 빠지겠죠.(웃음)”

“처음에는 다들 제가 우정출연으로 영화에 등장한다고 생각하셨나봐요. 봉준호 감독님이 ‘옥자’ 때 목소리 연기를 부탁하신 다음에 시사회 끝나고 내년에 스케줄을 비워둬라고 부탁하셨죠. 솔직히 제가 ‘기생충’에서 어떤 캐릭터를 연기할지 몰랐어요. 감독님이 콘티 딱 하나만 보여주셨거든요. 문광이 슈퍼맨 자세로 찬장을 미는 장면이었어요. ‘내가 옥자처럼 어디에 갇히는 건가’ 생각했죠. 그 장면을 찍을 때 ‘길라임’ 대역으로 유명한 스턴트 배우의 도움을 받았어요. 그런데 기우(최우식)는 정말 쉽게 그 장면을 찍는 거예요. 배신감 느꼈어요.”

이정은이 연기한 문광이란 캐릭터의 하이라이트 장면은 박사장네에서 쫓겨난 뒤 다시 집을 찾아 초인종을 누르는 모습이 아닐까? 그의 말투, 표정 모두 문광이 초반에 보여줬던 것과 180도 달랐다. 그의 모습 자체로도 ‘기생충’을 보는 이들의 몰입도를 높였고 극의 분위기를 뒤바꿔놨다. 다만 이정은이 생각한 문광의 최고 장면은 따로 있었다.

 

“어떻게 하면 문광이 재등장할 때 사람들의 궁금증을 유발하게 할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시나리오에는 ‘술에 취한 문광이 초인종을 누른다’라는 지문이 있었어요. 박사장(이선균)네에서 쫓겨나 다시 그 집을 찾은 만큼 최대한 예의있고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며 문을 열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죠. 누군가에게 공포를 심어주려고 한 연기는 아니었어요. 모든 게 감독님이 구상대로 만들어진 것이죠. 저는 문광이 남편 근세(박명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는 설정으로 연기했을 뿐이에요.”

“문광의 최고 장면을 꼽으라면 근세와 박사장네 거실에서 평화롭게 춤을 추고 커피를 마시는 모습이에요. 감독님한테 분위기있는 음악을 부탁했죠. 그게 바로 지아니 모란디의 ‘In ginocchio da te’였어요. 가장 아름다웠던 우리들의 ‘화양연화’ 같은 느낌이었죠. 그 장면 빼고는 문광이 그런 호사를 누리는 모습이 영화에 나오지 않잖아요. 그리고 모두가 그런 화양연화를 꿈꾸지 않을까요?”

‘옥자’에 이어 또 한번 이정은은 봉준호 감독과 함께 작업했다. 동갑내기 배우, 감독으로 알려진 두 사람에겐 신뢰가 존재했다. 서로의 스타일을 이해하며 어떤 일을 해도 믿음이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정은은 또한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박명훈 등 같이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고마움도 있지 않았다.

“봉준호 감독님은 정말 집요하세요. 인간의 폐부까지 꿰뚫는 힘을 가지신 것 같거든요. 정말 영화에 ‘미친’ 분이시라고 생각했죠. 송강호 선배님은 ‘택시운전사’ 때 오라버니로 부르다가 이번 영화에서 오빠로 부르게 됐어요. 저희 둘 다 50대가 되니 왠지 모를 편안함이 생기더라고요. 그리고 저를 워낙 귀여워하세요.(웃음) 선배님은 의외로 장난꾸러기지만 항상 동료 배우들이 최고의 연기를 펼칠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번 영화에서는 특히 여자배우들이 많이 나오죠. (조)여정씨, (장)혜진씨, (박)소담이까지, 여자배우 4명이 나오는 영화가 몇이나 될까요. 여정씨는 단순한 성격을 가진 연교 캐릭터에 모성애를 듬뿍 담아 자신만의 캐릭터로 만들었어요. 혜진씨는 독립영화 경력이 많아 연기력은 두말 할 것 없죠. 이렇게 넷이 모여있으면 걸크러시 콤비가 뭉친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칸을 사로잡은 이정은의 연기는 바로 북한 아나운서 말투를 흉내낸 것이었다. 그는 칸에서 직접 사람들의 반응을 보며 연기 인생의 새로운 경험을 맛봤다. 또한 한국영화 100년사 첫 황금종려상 수상, 850만 이상 관객 동원 등의 결과도 낳았다. 올 한해 드라마 ‘눈이 부시게’와 영화 ‘미성년’ 그리고 ‘기생충’에서의 존재감을 통해 이정은은 자신의 진가를 톡톡히 발휘하고 있다.

“북한 아나운서 말투를 따라하는 장면은 철저히 계산된 것이었어요. 감독님이 저한테 북한 이춘희 아나운서 자료를 보내주셔서 몇 달 동안 연습을 했죠. 이 장면을 칸영화제에서 본 해외 관객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솔직히 그들의 반응이 신기했어요. 한국 사람 입장에서 안타깝고 놀랄 만한 장면을 해외 관객들은 크게 웃어버리더라고요. 서로 문화가 달라 그럴 수 있다는 걸 처음 느꼈죠.”

“연극, 뮤지컬을 하다가 영상 쪽에 도전하게 된 건 연기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어요. 관객들과 상대하는 에너지를 느끼다보니 배우들끼리 발생하는 에너지에 관심이 생겼거든요. 솔직히 지금은 체력적으로 공연하기 힘들어요.(웃음) 하지만 무대 경험이 없었다면 영상 쪽에서도 체력적으로 버티기 힘들었을 거예요. 올해는 참 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눈이 부시게’로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조연상도 탔고 ‘기생충’도 황금종려상에 관객들도 많이 영화를 보셨죠. 하지만 여기에 그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어요. 빨리 이 행복을 잊고 새 작품을 통해 배우 이정은의 모습을 보여 드려야죠.”

사진=윌엔터테인먼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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