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년 새해 입구부터 주목할 만한 여성영화가 떠올랐다. 오는 12일 개봉하는 독립영화 ‘문영’은 두 여자가 끌어가는 상처와 연대의 이야기다. 지난해 각종 영화제 신인상을 휩쓸었던 ‘아가씨’ 김태리의 시작을 확인하는 작품으로 화제를 뿌리고 있다. 또한 러닝타임 40분 단편영화 버전으로 2015년 선보인데 이어 이번엔 1시간4분의 장편영화(감독판)로 관객과 만나게 돼 이채롭다. 이란성 쌍둥이를 탄생시킨 김소연(30) 감독을 10일 저녁 홍대 KT&G 상상마당에서 만났다.

 

 

하나. 4년 만에 태어난 ‘문영’

‘문영’을 잉태한 것은 2011년이었다. ‘Subway.days’라는 제목의 20쪽 남짓한 트리트먼트로 시작됐다. 이듬해 53쪽 가량의 시나리오로 완성했다. 영진위 지원을 받아 2013년 2월에 마침내 촬영이 시작돼 9회차로 마무리했다.

“지금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동시에 계속 영화를 만드는 게 업이라고 여겼던 시기였고요. 글을 써야 하는데 마침 그 시간이 있었어요. 처음부터 두 여자의 연대를 생각했다기보다 캐릭터에 대한 고민을 먼저 했어요. 문영과 희수라는 두 인물, 그들이 놓인 환경 그리고 두 여자가 만나게 되면 어떨까를 많이 생각했어요.”

개인적인 문제 탓에 영화의 완성이 늦어졌다. 2015년 12월 서울독립영화제 경쟁부문 단편 초청을 받아 첫 공개됐다. 이후 서울 프라이드영화제, 인디포럼 신작전에 잇달아 초청받으며 관객 사이에 작고도 뜨거운 반향을 일으켰다.

“처음 60분대로 만들었는데 2년이 지나 다시 들여다보니 시선이 객관적이 돼 줄이는 게 어렵진 않았어요. 그래도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한편으론 단편으로 하면 좀 더 많은 분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지 않을까란 판단도 들었고요. 장·단편 계획을 가지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 만듦새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다고 여겨요. 처음부터 그 계획을 잘 짜서 구조를 명확하게 하고 만들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구조가 있거나, 다른 이야기가 붙었을 수도 있었을 거 같아요.”

 

'문영'의 주연배우 정현(사진 위)과 김태리

둘. 문영과 희수, 퀴어코드

술주정과 욕설 등 패악질을 부리는 아버지와 단 둘이 살고 있는 18세 여고생 문영은 말을 하지 못한다. 네 살 때 집 나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 캠코더로 사람들의 얼굴을 담는다. 천애고아나 마찬가지인 28세 희수는 절교 통고를 받은 남자친구 집 앞에서 동네가 떠나갈 듯 울고불고 욕설을 퍼붓는다. 결핍 많은 두 여자가 만나 손을 잡는다.

“문영은 상처도 있고 센 아이 같은데 나약하고 미성숙한 인물이에요. 상처를 감추고, 더 큰 상처로 덮으려 하고, 치기 어린 행동으로 소통을 거부하는 스타일이죠. 문영이 수렴하는 스타일이라면 희수는 발산하는 스타일이에요. 하지 않아도 될 이야기를 다 표현하고 소리치고...그럼에도 정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하지 못하죠.”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상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같았던 두 여자는 그래서 본능적으로 서로에게 끌리지 않았을까. 특히 희수는 오랜 연인과 헤어지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까지 맞닥뜨린 상황이다. 단편에선 퀴어코드가 드러나질 않으나 감독판에선 또렷이 나타난다.

“그걸 염두에 두고 만든 영화는 아니었어요. 여자 2명의 유대가 중요했죠. 원래 희수 캐릭터에서 성 정체성을 고민하는 부분이 있었으나 단편에선 시간관계상 그걸 표현할 여지가 없었고, 장편에선 좀 더 많이 보여준 거예요.”

 

 

셋. 여배우 김태리와 정현

무명의 신인이었던 김태리는 사랑스러웠다.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애초 구상했던 다크한 이미지의 문영 캐릭터와 썩 잘 어울리는 모습은 아니었으나 “이 사람이랑 같이 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사랑스럽고 예쁜 친구가 연기하니까 문영이 연약하면서도 사랑스러워 보이는 효과가 생겼어요. 배우의 매력이 반영됐기 때문이죠. 프리 프로덕션 단계에서부터 잘 해냈어요. 디테일한 감정선에 대해 많이 물어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 다음부터 현장에서 막힘이 없었고. 똑똑하고, 야망 있고, 통찰력 있는 친구라 언젠가는 잘 될 거라 믿었어요.”

희수 역 정현은 천연덕스러우면서도 동적인 연기로 어둡고 거친 질감의 영화에 활력을 불어 넣는다. 재능은 많으나 노련함이 부족한 신인들 틈바구니에서 매끄러운 톤을 만들어주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대학(서울예대) 선배이기도 한 정현 언니는 과거 한 작품에서 연출부와 배우로 호흡을 맞췄던 적이 있어 인간적으로 신뢰하는 사이였어요. 자연스러운 연기를 해줄 거라 여겼으나 활력까지 불어넣어 준 점은 굉장히 고마워요. 언니는 배우로서 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으로 현명해요. 분석이 필요할 땐 분석적으로 연기하지만 머리를 쓰거나 복잡하기보다 직관으로 잘 해내는 배우죠.”

 

 

넷. 여성감독 그리고 자연인 김소연

지난해 한국영화계는 여성감독들의 활약이 눈부셨다. 이들은 실험적이면서 디테일한 연출력과 완성도 높은 미장센으로 충무로의 진부한 공기를 환기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감독들의 유리천장은 위태로우며 현실은 녹록치 않다.

“아직까지는 소수이고, 작품 안에 여성감독들 특유의 정서가 있기에 다르다고 여겨지지만 비율이 같아지다 보면 구분은 없어지지 않을까 싶어요. 일단 제가 잘해야죠. 차기작은 특수한 상황에 놓인, 흔치 않은 여성 캐릭터가 주인공인 영화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년기부터 창작에 관심이 많았던 소녀는 고교시절, 본격적으로 감독을 꿈꾸기 시작했다. 당시 표현에 서툴렀기에 매체를 통해서나마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어서였다. 대학에 입학해 연출을 전공하면서 "나 같은 사람이 영화를 만들어도 될까"란 고민을 집중적으로 했지만 조금이나마 나은 사람으로 잘 살 수 있을 거 같아서 지금까지도 영화를 하고 있다.

현재 그는 영화사와 프리랜스 계약을 체결하고 영화 프로젝트의 기획개발 업무를 맡고 있다. 생계를 위해 출퇴근하는 직장인인 셈이다.

“이 사람은 어떤 삶을 선택해서 살아가는가에 관심이 많아요. ‘문영’은 현실적인 이야기였는데 다음 영화는 그런 톤 앤 매너는 아닐 거 같아요. 기본적으로 다양한 장르에 대한 욕심이 있거든요.”

 

사진 김상곤(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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