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를 맞아 서른셋이 된 여자. 아직 대중의 시야에 또렷하게 들어오지 않은 배우. 12일 소규모 개봉한 독립영화 ‘문영’(감독 김소연)에서 스물여덟의 희수를 자연스러운 생활연기로 표현한다. 정현이란 파트너로 인해 신인 김태리는 윤기가 더욱 흐르고, 무겁고 거친 질감의 영화는 활력을 얻는다. 수은주가 영하로 곤두박질친 날 밤, 홍대 KT&G 상상마당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 "여러 표현 가능한 희수 캐릭터에 매력"

“처음엔 감독님이 1시간30분 분량으로 찍었고 이후 40분 단편으로 영화제에서 선보였고, 이번에 64분 러닝타임으로 개봉했어요. 개인적으로는 64분 버전이 좋아요. 저야 배우니까 40분짜리를 봐도 이해하지만 처음 보는 관객들은 끊기는 부분이 많지 않을까 걱정했거든요. 지금은 캐릭터의 이해를 도와줘 이야기를 따라가기 편하고 매끄러워졌어요.”

단편영화 ‘연인’의 여주인공을 맡았을 때 조감독이 대학 후배 김소연이었다. 그게 인연이 돼 2013년 무렵 ‘문영’의 캐스팅 제안을 받았다. 시나리오를 읽을수록 사람의 이야기를 깊게 다룬 점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헤어진 남자친구 집 앞에서 악다구니를 쓰고, 자신을 도촬하던 폐쇄적인 여고생 문영을 넉넉하게 품어주는 화끈한 희수에게 강하게 끌렸다.

“희수는 뭐든지 극대화시키는 인물이에요. 동네 언니 같은 느낌이다가 어떨 땐 하드코어 느낌이고 또 어떨 땐 여리여리해요. 그런 면이 힘들긴 했지만 배우로선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재밌었어요. 누구나 희수 같은 면이 있지 않을까요? 그녀처럼 정말 당당하고 솔직하게 표현하진 못했지만 ‘이렇게 살아가도 좋겠구나’란 생각에 고개가 끄덕여졌어요.”

희수는 뒤늦게 자신의 성 정체성을 고민한다. 단편 버전에선 드러나진 않았으나 퀴어 코드가 선명하게 그려진다. 문영에 대한 희수의 감정도 관객에 따라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고정관념 없는 친구라고 받아들였어요. 나이, 남성, 여성 모두를 동등하게 대하는 친구이며 관심 받는 걸 좋아하는 친구라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겠다, 싶었죠. 특히 작고 여리면서 예쁜 아이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에 문영을 좋아하게 됐을 것 같아요. 8년을 사귀다 헤어진 남자친구와도 첫 정이라 쉽게 끊지도 못했을 거고요.”

 

 

■ "새벽 고성신 가장 힘들어...무조건 직진할 것 같던 김태리"

추운 겨울에 저예산으로 작업했던 작품이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특히 희수가 첫 등장하는 연희동 골목길신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새벽에 술에 취해 전 남친의 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었는데 생목을 질러대다가 오열해야 했고, 다른 신인 골목길 오토바이 운전에 달리기 장면까지 몰아서 찍어야 했기에 매우 길게 촬영했어요. 다들 주무시는 시간이라 너무 신경이 쓰여 목과 손의 통증은 잊어버릴 정도였죠. 더욱이 그때는 컷 수가 많은 영화를 별반 해보지 않아서 감정 조절을 못해 한 번에 울어버렸더니 나중에 눈물이 나오질 않더라고요. 교훈을 얻었죠. 감정을 쪼개서 연기해야 하는구나!”

‘문영’은 하나하나 소중한 장면의 연속이다. 관객으로 봤을 때는 두 사람이 친해지면서 스쿠터를 탄 채 서울거리를 달리면서 눈빛으로 이야기하는 장면이 좋았고, 배우로서는 희수가 방안에서 원맨쇼를 하던 장면을 꼽는다. 전구로 온몸을 친친 둘러싼 채 퍼포먼스를 하던 장면은 자신의 아이디어가 많이 반영된 데다 희수로 빙의했기 때문이다. 함께 영화를 이끌어간 김태리와의 호흡은 어땠을까.

“희수가 말을 잃은 아이라 대사를 주고받지 않아서 호흡에선 힘들지 않았어요.(웃음) 태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느낌이 묘했어요. 강단이 있던 친구라 ‘아가씨’ 캐스팅 소식을 들었을 때도 놀랍지 않았죠. 이 친구는 무조건 직진하겠구나 싶었죠. 힘이 있는 친구인데 잘 안 풀렸으면 지금 많이 힘들어했을 거예요.”

3~4년 전에 찍은 뒤 바쁜 일상 탓에 페이드 아웃됐지만 ‘문영’은 늘 의식 언저리에 맴돌았다. 의미가 강하게 남았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세상으로 나오겠지” 했는데 이렇게 개봉하게 돼 감사할 따름이다.

 

 

■ 임주완 신동욱과 영훈고 연극반 활동...'멘토' 서울예대 선배 조정석

어렸을 적부터 춤에 능해 댄스가수가 꿈이었다. 영훈고에 입학하자마자 연극반에 입단했다. 3학년 선배인 임주완 신동욱의 총애를 받으며 열심히 활동했다. 처음 했던 독백의 짜릿함에 배우의 길을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자연스레 서울예대 연극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지금까지도 멘토로 여기는 같은 과 선배 조정석을 만나게 됐다.

“대학시절 제 공연을 보고 너무 좋았다며 소주도 따라주고 그랬어요. 멘토일 수밖에 없는 선배예요. 초심을 잃지 않은 채 겸손한 자세로 꾸준히 노력하며 재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워요. 배울 점이고요.”

뮤지컬 코러스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더욱 고뇌하고 싶고, 눈빛과 손끝으로 완성해나가는 연기를 더욱 파고들고 싶어 졸업 후 인도와 아시아 국가 여행으로 재충전을 한 뒤 2009년 유서 깊은 극단 인혁에 입단했다. 2년간 고된 막내 생활을 참아내며 기본기를 익혀나갔으나 극단이 해체되며 잠시 직장생활을 했다.

“너무 무기력해지더라고요. 지금 어떤 일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의미가 없었던 것 같아요. 에너지 소비가 안 되니 짜증만 났고 살만 쪘어요. 그때 마침 한예종 영상원 대학원을 준비하던 강진아 감독의 단편영화 ‘네쌍둥이 자살’에서 노는 여고생 역을 연기하며 쌓아온 에너지를 분출했어요. 그러면서 배우로 다시 돌아왔죠.”

 

 

■ 김서형, 루니 마라 닮은꼴...이경미 감독 작품 출연 원해 

이후 단·장편,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드라마의 크고 작은 배역을 오가며 쉼표 없이 활동했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낀 삶에 찌든 조교 초아로 출연한 사회풍자 단편영화 ‘스테이’로 국내외 영화제에 초청 받으며 능력을 인정받았다. 드라마 ‘빛과 그림자’에서는 김추자 이미테이션 가수 김춘자 역을 맡아 노래와 춤 실력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오디션을 보는 거에 비해서 성과가 많지 않아서 힘들었어요. 그것 때문에 많이 방황하기도 했고요. 하지만 결국은 연기와 등지진 못하겠더라고요. 독립영화와 상업영화에서 의미 있는 여성 캐릭터가 너무 없어서 답답하긴 하지만 굴하지 않고 두드려보려고요. 언젠가는 길이 열리겠죠. 소망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존재하는, 누군가 봐주는 먼지와 같은 배우가 되는 거예요.”

여배우 김서형과 루니 마라를 연상케 하는 외모의 정현은 관객을 불편하게 하지 않는 편안하면서도 재밌는 연기를 추구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즈음, 갑자기 ‘미쓰 홍당무’ ‘비밀은 없다’의 이경미 감독을 언급했다. 새로운 여성 캐릭터를 갈급하는 여배우들에게 힘을 준 영화인이라며 “언젠가 감독님 작품에 꼭 출연하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사진 김상곤(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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