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은 권력의 본성인 악한 선(善)을 이야기한다. 반드시 누군가를 밟고 해치고 이겨야만 도달할 수 있는 정점, 그 한가운데 서있는 무소불위의 검사 한강식. 배우 정우성(44)은 우아한 마스크에 악한 선의 이중적 면모를 덧입는다. 찬연한 외모로 꼭짓점의 시혜자 같은 인상을 전하면서, 스스로 망가짐을 불사해 추악한 권력의 투페이스를 은유한다.

숱한 작품에서 히어로적 면모를 뽐냈던 정우성에게 한강식은 기존의 이미지가 아닌 새로운 도전이다. 악독하고 강렬하며 무시무시한 변신은 ‘미남 배우’라는 인식과 한계를 돌파, ‘명품 배우’ 타이틀을 공고히 한다. 찬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 날,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와 삶을 대하는 인간 정우성의 속마음을 털어놨다.

  

Q. ‘더 킹’에선 그동안 정우성에게서 볼 수 없던 악역 캐릭터를 맡았다. 다른 이미지를 구축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었나?

A. 굳이 그런 욕심이 있던 건 아니다. 배우들은 출연하는 영화에 대한 의미를 찾곤 한다. 스스로도 예전에는 단순히 개인 취향이나 성취감 같은 사소한 의미를 찾곤했다. 그런데 이제 나이를 먹으면서는 영화가 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던질 수 있을지 먼저 신경 쓰게 됐다. ‘더 킹’도 이런 마음에 선택을 하게 됐다.

 

Q. 메시지를 잘 전달하려면 캐릭터에 깊은 공감과 이입이 필요한데, 한강식이라는 캐릭터가 이해하기는 그리 쉬운 인물이 아니었을 것 같다.

A. 이해하기보단 무너뜨리고 싶었다.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돌아보면 모든 문제는 정치가 권력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시작됐다. 누구에게나 분명 처음엔 애국심과 신념이 있었을 텐데, 이를 저버리는 사람들의 구조적 망가짐에 집중했다. 삐뚤어진 권력을 위해 누구든지 집단 안에서 삐뚤어진 선택을 할 수 있다.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한강식 캐릭터를 통해 이 삐뚤어짐이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전달하고 싶었다.

  

Q. ‘더 킹’이 더 주목받는 게, 현실의 삐뚤어진 권력 행태를 고스란히 녹여냈기 때문인 것 같다. 영화 자체가 너무 신랄하다보니 출연에 약간 망설임이 있었을 것도 같다.

A. 망설임은 없었다. 사실 시국이 이렇게 흘러가서 우연한 타이밍을 맞은 거지 시나리오를 받고, 촬영할 때는 상황이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작품이 정치, 검찰에 대해 부정함을 알고도 바로잡을 의지가 없던 우리 사회에 큰 문제의식을 남길 것이라고 생각은 했다. 이를 통해 사회를 향한 변화 요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감을 가진 정도였다. 어떻게 보면 요즘 정치 상황이 ‘더 킹’의 메시지 전달에 더욱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있는 것 같다.

 

Q. 사실 영화를 즐겁기 위해 보는 관객들도 많다. 작품 속에 무언가 깊은 메시지를 담는다는 게 반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는 없었나?

A.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모호하면서도 폭넓다. 관객이 어떤 즐거움을 얻어가느냐는 영화마다 다를 것 같다. 지금 시국에 맞춰 영화가 줄 수 있는 즐거움이 무엇일까를 생각해봤을 때 사회 비판이나 통쾌함, 이상적인 해피엔딩 등등 다양하다. 물론 현실의 칙칙함을 영화에서마저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도 영화가 ‘시대정서와 공감을 하는 것’은 무척 중요하다. 시대정서를 외면하면 문화는 단지 일시적인 소비에 그치고 만다. 반면 시대정서와 발을 맞춘 문화는 함께 소유하는 것이 된다.

  

Q. 이번 작품에서 특히 후배 배우들과의 호흡이 인상적이었다. 공연한 후배들은 언제나 “정우성 선배를 닮고 싶다”고 얘기한다. 존경받는 선배가 되는 비법이 있나?

A. 24년 동안 촬영 현장에서 봐왔던 좋은 선배들은 늘 현장에서 초심을 유지한다. 특히 현장에서 함께 하는 동료들에 대한 태도가 변하지 않는다. 관계를 신선하게 유지하면서도 긴장감을 잃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 영향을 받은 덕인지 나 역시도 현장에서 늘 새롭고 즐거우려고 노력한다. 영화는 혼자 찍는 게 아니라 공동작업이다. 현장에서는 선후배라기보단 ‘동료’다. 이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기 때문에 후배들이 그렇게 봐주는 것 같다.

 

Q. 관계에 대한 신념이 꽤 남다른 것 같다. 그 마음가짐을 품는 것도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A. 노력보다는 기본적인 걸 지키면 된다. 옆 사람이 남 욕할 때 동조하지 않는 게 도덕인 것처럼 개개인에 대한 존중을 지키면 된다. 이걸 굳이 거창한 철학 속에서 실행해야한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보통은 남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귀찮아서 안 하는 거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일 때 “괜찮아?”라는 한 마디의 질문이 관계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 사람 한 사람마다 개개의 인격체다. 누구를 대하든 일관된 태도를 지키면 ‘나’라는 사람의 가치관도 명확해 질 것이라 생각한다.

  

Q. ‘나를 잊지말아요’ ‘아수라’ ‘더 킹’까지 1년 사이에 3편의 작품이 개봉했다. 지치지 않고 달리는 모습이 경외감을 불러오기까지 한다.

A. 사실 지쳤다. 작품 때문이라기보다는 뒤풀이의 피로가 쌓여있다.(웃음) 배우라는 게 짧은 시간 안에 모든 걸 쏟아내고 집중해야 하는 워낙 감성적인 직업이다. 그래서 촬영이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밤늦게까지 생각과 기운을 나누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다. 어찌보면 영화인은 비정규직에 24시간 노동자다.(웃음) 그래서 쉬는 타이밍에 힘을 풀어야 다시 힘을 줄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품 사이사이에 잠깐 여행을 다녀오거나 운동을 하면서 해소를 하곤 한다.

 

Q. 이제 24년차 배우다. 지금 다시 돌아본 연기자 생활은 어떤가?

A. 얼마 전에 ‘내가 배우 안 했으면 뭘 했을까?’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불행하게도 할 게 없더라. 학교도 그만두고 나와서 직장을 잡기도 힘들었을 거다.(웃음) 배우라는 직업이 사실 굉장히 불편하다. 영화 안에서 보여지는 찬란함이 있지만, 세트장 바깥의 삶은 한정적이고 단절돼 있다. 어릴 때는 “다시 태어나도 배우할 거예요”라고 그랬는데, 지금 보면 멍청한 생각이다.(웃음) 하지만 또 소중하다. 내 스스로의 역사가 연기에 녹아지니까... 참 지랄 맞은데, 참 매력적인 시간이었다.

 

Q. 과거 ‘청춘의 아이콘’이었지만 이젠 완벽히 40대 ‘어른’이다. 앞으로의 걸음은 어디로 이어질까?

A. 사실 어른이라고 얘기하기에는 조금 섭섭한 나이인 것 같다. 이제 조금 남자, 이제 조금 어른의 ‘어’자 까지는 다가선 것 같은 느낌이다. 언제 어른이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른이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꼰대’는 되지 말자는 거다.

 

사진=NEW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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