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겨울에 따뜻한 가족영화 한 편이 날아온다. 남처럼 살아가던 오씨 3남매가 아버지의 사망 이후 갑자기 나타난 막둥이로 인해 화해하게 되는 내용의 ‘그래, 가족’(감독 마대윤·2월15일 개봉)에서 이요원(37)은 가족을 짐짝처럼 여기나 이면으로는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등허리가 휜 흙수저 방송사 기자 수경 역을 맡았다. ‘전설의 주먹’ 이후 4년 만에 스크린 나들이를 한 삼청동 카페에서 노크했다.

 

 

01. ‘욱씨남정기’ 촬영 당시 시나리오 받아

JTBC 드라마 ‘욱씨남정기’에서 칼 같은 본부장 욱다정을 연기하던 당시 ‘그래, 가족’ 시나리오를 받았다. “웬만큼 이상하지 않으면 해야겠다”란 영화에 대한 갈망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라 ‘막둥이’란 가제의 시나리오를 펼쳐들었다.

“제목 때문에 시골 이야기인가? 부모님이 막둥이를 낳는다는 건가?란 생각으로 읽다가 펑펑 울었어요. 성인 남매, 형제 가족 이야기인 점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남매가 주인공이었던 작품은 별반 없어서 신선하기도 했고요. 책임감 강한 수경 캐릭터가 저와 닮은 면이 많아서 공감도 많이 됐죠.”

다만 욱다정과 오수경의 날카롭고 당차고 상대에게 독설을 서슴지 않는, 비슷한 톤이 눈에 밟혔다. 똑 같은데 또 해야 하나? 요즘은 여자 캐릭터가 다 이런가?란 생각이 스멀스멀 들었다. 하지만 읽다보니 욱다정과는 달랐다. 다정이 판타지적인 캐릭터라면 수경은 형제들한테 욱하고 짜증내는 거고, 작품도 가족드라마였다. 그게 다른 지점이라고 여겼다.

더욱이 재벌가의 막장 가족이 아니라 우리 주변에서 현실적으로 볼 수 있는 가족의 모습인 점도 자석처럼 끌어들였다.

 

 

“저는 여동생과 둘 밖에 없어서 이렇게까지는 아닌데 3남매 이상이면 이런저런 갈등이 많아서 누구랑은 안보고 지내는 관계도 많더라고요. 그래서 이 영화의 설정이 현실적이라 여겨졌죠. 또 제가 사람과 친해지는데 시간이 걸리는 편인데 설정 때문에 배우들과도 일부러 친해지려고 하지 않아서 좋았고요. 첫 촬영분이 아버지 장례식장 신이라 너무 잘 들어맞았죠. 안보고 지내는 형제자매들은 가족 장례식장에서나 대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고요.”

 

02. 청순가련 ‘캔디’에서 까칠한 ‘얼음공주’로 

이요원은 20대와 30대 초반까지 귀엽고 청순한 캐릭터들을 줄곧 연기했다. 2013년 ‘황금의 제국’에서 야망으로 똘똘 뭉친 재벌가 둘째딸 최서윤을 맡아 눈에서 파란 불꽃이 일 만큼 도도하고 까칠한 여성 캐릭터에 몸을 실은 뒤 이후 ‘욱씨남정기’ ‘불야성’ 3연타를 쳤다.

“이런 싸늘한 캐릭터를 연기한지 얼마 안됐어요. 반응이 좋으니 비슷한 제의가 자꾸 들어오는 거죠. 원래 이런 연기를 잘 못했어서 저도 신기할 따름이에요. 생긴 게 동글동글해서 귀엽고 청순하거나 윽박지르면 위축되는 인물을 많이 했죠. 센 연기를 못해서 ‘난 못하는 구나’라 자조했죠. 당시엔 도시적인 커리어우먼을 굉장히 하고 싶었거든요. 이제 선배들 나이가 되다보니 그런 역할을 맡게 되나 봐요.”

이요원표 악녀 연기는 특별한 구석이 있다. 시크한 모드, 절제된 톤으로 냉기를 전달한다. 똑 부러지는 대사처리는 향후 김수현 작가의 뮤즈로 낙점될 만하다. 여기에 내면의 나약함과 같은 디테일마저 놓치지 않는다.

 

 

“성격이 러블리하진 않아요.(웃음) 기존에 배우들이 많이들 했으니까 나만의 방식으로 연기하려고 했어요. 생긴 것 때문에 눈을 극대화하는 표현 같은 걸 못하니까 다른 방식으로 시도했고요. 과감한 액션을 덧입히면 기존의 악녀가 되는 거라 센 대사를 절제된 표현으로, 밋밋하게 툭 하니 던지면 오히려 더 세고 무서울 거라 판단했죠. 표독스럽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더니 또 다른 캐릭터가 나왔어요.”

 

03. 모델 출신...20년차 여배우 위엄

공효진 김민희 신민아 이솜 등 요즘 20~30대 대세 여배우들 상당수는 모델 출신이다. 이요원은 배두나와 함께 ‘원조’ 라인을 구축하는 주인공이다. 잡지·화보 모델로 인기를 누리다 연기자로 터닝했다.

“그때는 방송계 종사자들이 잡지, 패션 카탈로그를 보고 오디션을 보라고 연락해오던 시절이었어요. 쇼 모델을 해보지 못한 건 아쉬워요. 바로 다음 단계였는데.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던 동기들이 다 잘됐어요. 지금까지도 각자의 색깔을 가지면서 각각의 장르에서 잘하고 있어서 뿌듯해요.”

1998년 영화 ‘남자의 향기’로 데뷔한 지 20년이 됐다. 두 세대를 가로지르며 연기자로 입지를 단단히 굳혔고, 한 남자의 아내이자 세 아이의 엄마로 안락한 가정도 꾸렸다.

 

 

“어렸을 땐 나한테 재능이 있구나, 처음 느껴서 자신감이 충만했고 열정이 컸죠. 세월이 그 만큼 흘렀다는 게 안 믿겨지죠. 별다른 굴곡 없이 꾸준히 일해왔고 아직도 주인공을 할 수 있다는 거에 감사해요. 지금은 매 작품 끝날 때마다 발전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스스로 느끼기에 그러지 못하면 엄청난 스트레스와 상실감에 빠져 들더라고요. 치열한 역할들을 주로 하다 보니 더 그런 듯해요. 이제는 편하게 풀어지고, 말랑말랑한 역할을 하고 싶어요.”

마흔이 넘어선 범죄영화의 히로인을 하고 싶다. “역할에도 낯가림이 좀 있다”고 고백하나 인터뷰 석상에서도 맺고 끊는 게 시원시원한지라 전혀 그래보이질 않는다.

“너무 캐릭터적인 걸 많이 해왔어서 현실적이고 일상적인 연기에 굶주렸어요. ‘그래, 가족’은 그런 욕망을 충족시켜준 작품이고요. 첫 발을 디딘 게 영화라 영화배우로 살 줄 알았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드라마를 많이 하게 됐거든요. 영화는 고향과 같은 매체라 아무리 여배우가 할 만한 작품이 적더라도 기다리려고요. 독립영화나 저예산영화들도 댕큐예요.”

 

사진 권대홍(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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