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캐릭터를 만나도 전형적으로 그려내지 않는 배우 길해연(55)이 지난 여름, 예의 허스키한 목소리와 신들린 듯한 표정으로 무대를 용광로처럼 달궜다. 입추와 처서를 지나 소슬바람 불어오는 초가을까지 그 열기를 이어갈 전망이다.

연극 ‘미저리’(9월15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여주인공 애니 윌크스를 맡았다. 폭설이 내리던 날, 교통사고로 부상당한 뒤 그의 집에 감금당해 지내는 베스트셀러 작가 폴 셸던 역 김상중·안재욱과 앙상블을 이루며 긴장과 이완의 연기술로 객석을 휘어잡고 있다. 지난해 초연에 이어 재연 무대에도 등장해 다시금 관객과 공명하는 길해연을 광화문 네거리에서 만났다.

“초연 때는 광기와 서스펜스에 주력했다면 이번엔 애니 내면의 상처와 외로움을 표현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요.”

실제 스티븐 킹 원작 소설을 1991년 영화화한 ‘미저리’는 여배우 캐시 베이츠의 위압적인 풍모와 성격 연기로 다른 배우가 대체 가능할 것으로 여겨지질 않았다. 이 영화 이후 ‘미저리’는 ‘집착’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하지만 2015년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지면서 여주인공의 이미지에 변주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번 공연에서 길해연은 캐시 베이츠처럼 무시무시하진 않으나 애니의 서사와 드라마를 강조하며 관객에게 곁을 내준 느낌이다.

“처음 제안받았을 때 ‘나보고 애니를?’ 하며 놀랐어요. 가늠이 안됐죠. 그런데 감독님이 ‘선입견을 깨고 싶다’ 하시더라고요. 외형적인 무서움, 무게감을 빼겠단 거였죠. 아주 보편적인 사람이 그런 일을 벌이는 게 더 공포스럽잖아요. 저 역시 연극을 바탕으로 다른 지점에서 주는 공포를 찾아보고 싶었고요. 다행히 초연 성과가 좋아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번엔 애니의 디테일한 개인사를 살려내고 싶어진 거죠.”

원래 내면에 광기로 가득찬 인물이란 ‘공식’을 지워버렸다. 감독 역시 애니의 전사를 일부러 배제했다. 시골마을에 사는 전직 간호사 출신 1인가구 애니 윌크스. 멀쩡하게 잘 사는 것 같은, 독립심 강하고 총명한 중년여성이다. 유명 작가의 글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며 다시 쓰게 만들 정도다. 조금 더 속내를 들여다보면 청교도적인 어머니 아래서 성장, 어린 시절부터 결핍과 트라우마를 축적했다. 불온한 세상이 자신을 기만한다는 피해의식에 빠져 지낸다.

‘미저리’는 드라마 PD로 유명한 황인뢰 감독 연출작이다. 지난 2012년 연극배우 길해연을 드라마 ‘아내의 자격’에 출연시키며 안방극장으로 이끈 뒤 ‘풍문으로 들었소’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봄밤’에 이르기까지 연달아 호출한 안판석 PD와 더불어 ‘잊지 못할 연출자’ 2인이다.

“두 분이 많이 비슷하세요. 굉장히 섬세하고 디테일에 강하고, 여성의 심리도 잘 꿰뚫어 보세요. 반면 매우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있죠. 배우에게 자유를 주고 존중하되 본질에서 어긋나면 가장 엄격하게 바뀌죠. 코드가 맞나?(웃음) 그분들과 일할 땐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버티질 못해요. 또한 두분 다 배우의 인문학적 사고를 중시하세요. 생각없는 걸 안좋아하는 거죠.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는 것도 질색하고."

‘미저리’는 2인극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애니와 폴, 2인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주도한다. 그러다보니 폴 역의 배우와 다른 작품들보다 배로 정이 들 정도다. 지난해에도 함께 공연했던 김상중의 경우 재연에서 유머러스한 부분이 늘어났다. 핑퐁게임 하듯 죽이 척척 잘 맞는 단계다. 새롭게 합류한 안재욱의 경우 일찌감치 작품 및 캐릭터 분석을 끝내 편한 호흡을 나누는 중이다.

“김상중 배우의 폴을 만나면 동년배 느낌이 나서 여유롭고, 안재욱씨 폴과 함께하면 연하남 케미가 생겨나요(웃음). 더 생김. 상중씨는 느물느물한 면이 있으면서 영민한 배우인 거 같아요. 재욱씨는 세상 이렇게 성실한 배우는 처음 봤고요.”

인터뷰 도중, 배우의 인문학적 토대를 강조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기계처럼 상황에 걸맞는 똑 부러지는 연기를 수행한다고 능사가 아님을 설득력 있게 들려줬기 때문이다.

“대본에는 세상 사는 복잡한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인물들은 뭔가를 주장하고, 역사 속에서 살아가잖아요. 물방울처럼 떠있는 존재는 관객에게 늘 먹히질 않아요. 보다 더 디테일해야 하고 리얼함을 추구해야 하는 게 배우의 몫인 거죠. 그러려면 배우도 역사, 철학, 예술, 문학 등에 폭넓은 관심을 가지고 많이 공부해야 하는 거죠. 연기술도 변화해야 해요. ‘예전에 이랬었어’는 안먹혀요.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이 뭘 보고 공감하는지를 고민해야 하죠.”

매너리즘에 빠져서 안전한 걸 하는게 아니라 보다 좋은걸 찾아내는 게 배우의 덕목이라 주장한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시도해야 소비자가 만족햐고, 질좋은 문화를 접하게 된다고 강조한다. ‘나도 이렇게 배웠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있을거야’란 마인드가 공감대 형성의 열쇳말임을 강변한다.

유년기부터 글재주가 뛰어나 상을 휩쓸었다. 풍문여고 문예반 출신인 그는 작가의 꿈을 품고 지냈다. 자연스레 동덕여대 국문과에 진학, 희곡을 매력적으로 여기다 극회에 입단했고, 대학 4학년 때인 1986년 10개 대학 극회와 함께 ‘작은신화’를 창단했다. 숱한 작품을 올리고, 창작극을 인큐베이팅 했으며 대표를 거쳐 현재 부대표로 활동 중이다.

문학소녀였던 길해연은 “대본에 쓰여진 표현과 인물들의 심리에 대한 이해, 행간의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이 지금의 배우 길해연을 있게 한 원동력”이라며 30년 넘게 팽겨져놓은 보따리와 같았던 글쓰기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곧추세웠다.

“늘 갈망은 있었어요. 잘 써야한다는 강박이 과거에 있었죠. 그게 창작자들에게 가장 무서운 셔터였음을 알게 됐어요. 아는 걸 맘껏 풀어낼 때 진정한 창작자가 되는 듯해요. 자꾸 검증받으려 하는게 아니라. 내가 지금 알고 있는 것들 다 모아서 누구의 눈도 두려워하지 않고 시도하는 게 중요함을 뒤늦게 깨달았어요. 재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예술가가 되고 안되고를 가르는 것 같아요.”

 

◆ 에필로그-연극인생 33년

최근 예수정 이정은 전혜진 황석정 황영희 고수희 등 연극계를 호령하던 여배우들이 드라마와 영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중이다. 이 대열의 중심에 선 길해연은 연극인생 33년째다. 연극 ‘돌날’ ‘맥베드’ ‘더쇼’ ‘사랑이 온다’ ‘물고기의 축제’ ‘꿈속의 꿈’ ‘봄날은 간다’ ‘전쟁터를 훔친 여인들’ ‘그림자 아이’ ‘위대한 유산’ 등에 출연했다. 2011년 극단 전망의 ‘사랑이 온다’로 동아연극상을 수상했고, 2015년 이해랑 연극상을 받았다. 배우로서는 4년 만의 수상이라 화제를 뿌렸다. 당시 심사위원회는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데다 인문학적 소양까지 갖춤으로써 난해한 작품들도 탁월하게 소화해내는 배우”란 선정이유를 밝혔다.

사진=한제훈(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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