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로에 걸출한 신인 여배우가 탄생했다. 박지후(16)가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를 휩쓸고 있는 ‘벌새’(감독 김보라)에서 열 네살 은희 역을 맡아 제18회 트라이베카 영화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서너 편의 작품에 아역으로 출연한 경력이 고작이다. 첫 영화 주연작에서 경이로운 연기를 펼쳐낸 소녀를 만났다.

‘벌새’는 1994년의 여름과 가을을 바라본다. 단짝 친구와 콜라텍을 다니고 입 담배도 피우고, 문구점에서 장남삼아 도둑질을 하다 걸리고, 남친과 첫키스를 경험하는 등 세상이 궁금한 중학교 2학년 은희는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서 급류처럼 소용돌이치는 소소한 사건과 성수대교 붕괴라는 대형 사고를 겪으며 혼란과 좌절을 느낀다.

하지만 자신과 진심으로 소통하는 한문선생님(김새벽)과 만나고 이별하며, 단짝 친구와 우정을 두텁게 다져나가며 희망을 품은 채 세상 속으로 용감하게 걸어 들어간다.

‘요즘’ 아이인 박지후는 말간 표정과 생기발랄함을 거침없이 오가며 ‘그 시절’ 아이 은희와 한몸으로 동화돼 간다. ‘대사 없는’ 장면에서 눈빛과 분위기로 만들어내는 파장은 만만치 않다. 어린 나이에 큰 스크린을 존재감으로 가득 채워낼 줄 안다는 징표다.

“은희가 대사가 많은 편은 아니었어요. 눈빛으로만 전달해야 하는 장면이 많아서 상황마다 몰입할 수밖에 없었어요. 미묘한 눈빛 차이도 있어야 하고, 어떻게 진실되게 전달해야 할지 어려웠어요. 많이 상상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했죠.”

처음 시나리오를 읽었을 땐 학교와 가정에서 차별받고 폭력에 노출된 은희가 불쌍하게 여겨졌는데 점차 일반적인 아이로 다가왔다. 오빠에게 뺨을 맞는다든지 하는 건 예외적이지만 나머지는 일반 10대와 같았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어하는, 쓸쓸한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성친구나 부모님과의 관계는 그냥 학생 모습이어서 공감이 많이 갔고요. 은희나 저나 같은 10대이다 보니 친구랑 싸우고 나서 화해하는 장면 찍을 때는 실제 친구 떠올리면서 연기했죠. 감정의 크기만 차이가 날 뿐이지 은희의 경험이나 감정은 저도 충분히 겪었던 거라 ‘보편적 은희’라는 말이 어울린다고 여겼어요.”

시대 배경이 태어나기도 전인 1994년이라 삐삐나 콜라텍, 한문학원 선생님 설정은 낮설었지만 그것을 제외하고는 무리가 없었다. 사람 사이의 관계에선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은희를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보는 게 좋았어요. 처음 들어본 ‘사랑은 유리 같은 것’과 같은 음악들도 좋았고요. 남자친구 지완이를 쿨하게 차고난 뒤 집으로 들어와 거실에서 혼자 방방 뛰는 장면이 제일 많이 기억에 남아요. 많은 일들이 일어나서 복합적인 감정을 표출해야 하는 신인데 연기경험이 턱없이 부족해서 감이 안 잡혔거든요. 그러다 ‘지금 느끼는 내 감정을 솔직하게 다 드러내 보자’란 생각에 몸부림을 쳤거든요. 다행히 은희의 감정이랑 비슷하게 느껴져서 오케이 사인이 나왔어요. 내 안의 틀을 깨서 가장 힘들면서도 좋았던 신이에요.”

박지후는 은희처럼 활동적이며 당차고 열정이 넘쳐난다. 부모에게서 사랑받고 싶어하는 마음, 이성친구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도 설레하는 심리마저 비슷하다. 반면 다소 과묵한 은희와 달리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말이 많다. 은희가 벌새라면 자신은 덤벙대고 수다스러운 참새란다.

“‘벌새’를 통해 많은 걸 배웠어요. 감독님의 경우 늘 신의 마지막 테이크는 자발적으로 연기해보라고 주문하셨어요. 처음엔 당황스러웠는데 스스로 하다 보니 ‘이런 공간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이런 말을 할 수도 있구나’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연기의 폭을 넓혀갈 수 있었던 계기가 됐죠. 시나리오를 볼 때도 글로 연기를 익히는 게 아니라 제가 더 깊게 파고 들어가야 하겠더라고요. 지문이나 대사에 신경 쓰기보다는 이때 은희는 어떤 감정을 느꼈고, 왜 그랬을까를 많이 고민했죠.”

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그는 아나운서가 꿈이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연기학원에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가 카메라에 익숙해지기 위해 학생잡지 표지모델을 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난생 처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하는 영예를 누렸고, 뉴욕에서 열린 트라이베카 영화제는 시험기간이라 참석하지 못했다. 등굣길에 여우주연상 낭보를 전해 들었다.

“엄마한테 전화로 소식을 듣고는 학교에 달려가서 가장 먼저 선생님께 자랑했어요. 공교롭게 입고 있던 맨투맨 셔츠에 ‘NEW YORK’이란 빅로고가 박혀 있어서 친구들이 ‘노리고 있었던 거 아니었냐’며 놀려댔죠.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연이어 벌어져서 얼떨떨하고 감사해요.”

마음속의 축제는 이제 문을 닫으려 한다. 경험과 연기력 부족에 대한 숙제 때문이다. ‘벌새’는 백지상태에서 자발적으로 했던 연기였으나 다른 현장은 어떨지 몰라 충분히 준비된 상태를 만들어놓을 요량이다.

“동경하는 배우는 한지민 선배님이에요. 처음 ‘플랜맨’(2014)이란 영화로 알게 됐는데 노래도 부르고 사랑스러운 배우였어요. 이후 드라마와 영화 출연작을 봤는데 되게 멋지세요. 연기도 잘하시고 눈빛도 확 끌리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 많이 하셔서 존경하게 됐어요. 아직 10대이고 2년 뒤면 성인이 되니까 지금은 로맨스 학원물을 해보고 싶어요. 제 실제 성격이 묻어나는 밝은 아이였으면 좋겠어요.”

배우 김지원을 닮은 외모에는 소녀의 연약함과 여자의 단단함이 공존한다. 영화 ‘한공주’ 천우희의 핫샷 데뷔처럼 강렬한 인상을 남긴 10대 여배우가 만들어갈 발자취가 궁금해진다.

사진=한제훈(라운드테이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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