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궁금합니다. 열 개의 키워드로 자신을 소개해주세요.

싱글이라면 누구나 무엇이든 픽업할 수 있는 Single’s 10 Pick.

김재면(28, 대학원생)

 

1. 프렌치 프레스

 

 

'저는 커피를 좋아해요'라고 말하는 것은 여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내 또래에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맛있는 커피를 직접 준비하는 일은 까다롭다. 커피에 대해서 전문적인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커피의 분쇄도와 저항, 물의 온도, 추출 시 물의 양과 시간 등 커피의 맛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요소들을 알고 있을 경우는 전무하다.

만약에 당신에게 프렌치 프레스가 있다면 이 모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좋은 원두와 뜨거운 물 그리고 약간의 여유가 당신에게 필요한 것의 전부이다. 프렌치 프레스는 만드는 사람의 실력에 큰 구애를 받지 않고 원두의 본연의 맛을 최대한 끌어낸다. 실제로 한 해의 최고의 원두를 가리는 '컵 오브 엑설런스(Cup of Excellence)'라는 대회에서도 원두를 평가할 때 프렌치 프레스를 사용한다. 나는 늘 프렌치 프레스 같이 진입 장벽은 낮지만 진실 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내가 프렌치 프레스를 동경하는 이유이다.

 

2. D'Angelo - Voodoo

 

 

디안젤로는 90년대를 풍미했던 네오소울의 대표적인 아티스트이다. 그의 천재적인 음악성이 고스란히 담긴 이 앨범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프랭크 오션(Frank Ocean), 미구엘(Miguel), 더 위켄드(The Weeknd)같은 불세출의 PBR&B 싱어들은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Voodoo는 섹시하고 지적인 앨범이다. 내 자신 아니, 어쩌면 모든 남성들이 선망하는 그 두 가지 매력 말이다. 차마 번역할 수 없는 직설적인 섹스 노래를 하면서도 끈임 없이 자기 존재에 대한 고민을 이어나간다. 나에게 섹스어필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날이나 내 방에 여자 손님이 올 일이 있는 경우 이 앨범을 걸어 놓고 감상하곤 한다.

 

3. 모나미 검정 플러스 펜

 

 

지금보다는 어렸던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내 필통은 늘 형형색색의 펜들로 가득 차 있었다. 교과서에 알록달록한 밑줄들을 긋고, 필기하다 질리면 낙서를 하는 일이 즐거웠다. 역시나 나는 공부 못하는 전형적인 유형의 학생이었다. 이제는 나이를 조금 더 먹었고, 또 공부도 살짝 더 많이 하게 되었다. 지금 내 필통에는 모나미 검정 플러스 펜 몇 자루만이 담겨 있다. 미니멀하지만 이 만큼 펜의 기능에 충실한 펜이 또 있을까 싶다. 저렴한 것도 매력이지만 무엇보다 펜촉이 너무 뛰어나다. 심지어 펜을 쥐고 누르는 힘까지 선에 반영될 만큼 섬세하다. 그림을 그릴 때도 플러스 펜으로 그린다. 이제는 휘양 찬란한 색들보다는 나를 더 간단하게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게 된 모양이다.

 

4.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그리 긍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나의 말하는 방식이나 생활 태도의 기저에는 늘 냉소가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나의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면 이런 나를 건강하지 않은 사람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지만 나는 누구보다 건강하게 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삶에 긍정적인 태도를 갖지 않는 것이 곧 삶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누구는 날이 좋아서 기분이 좋고, 어떤 사람은 날이 너무 좋아서 슬픈 것과 같이 굳이 말하자면 인식의 차이인 것이다.

멜랑콜리아에서는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하는 상황에서 누구는 슬퍼하고 또 다른 누구는 이 상황을 반기며 즐거워한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늘 이런 식이다. 인물들을 극한의 상황까지 몰아 부치고 그 플롯에서 생겨나는 모순들을 최대한 자극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 가상의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5. 바이닐

 

 

우리는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에 더 익숙한 세대이다. 듣고 싶은 음악이 있으면 검색창에 간단한 키워드를 집어넣어 바로 들을 수 있고, 또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모아 간단하게 플레이리스트를 작성할 수 있다. 믿기 힘들겠지만, 예전에 음악은 180g 만큼의 무게가 있던 물건이었다. 180g은 좋은 품질의 바이닐의 기준이 되는 무게이다. 바이닐로 음악을 듣는 것은 핸드폰으로 음악을 듣는 것보다 매우 귀찮은 일이다. 바이닐 한 면에 많아야 네 곡 정도의 음악 밖에 들어있지 않아서 조금만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금방 재생이 끝나버린다. 그러면 판을 다시 뒤집고 바늘을 올려줘야 한다. 내가 듣고 싶은 트랙만 골라 듣는 일은 포기하는 편이 낫다. 바이닐에서 내가 따로 듣고 싶은 트랙이 파인 홈을 찾아 정확히 바늘을 올려놓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바이닐로 음악을 들으려면 턴테이블 앞에서 집중해서 음악만 들어야 한다. 온전히 음악을 위해 집중하는 순간도 내 일상엔 필요한 부분이다.

 

6.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

 

 

기형도의 시집을 들고 다닌다. 짧은 생을 살았던 시인이기 때문에 전집을 제외하고는 이 시집밖에 남아있지 않다. 교과서에서 볼 수 있는 빈 집이나 질투는 나의 힘 등 그의 주옥같은 시가 이 책에 담겨있다. 그의 시에는 지독한 염세주의, 불안과 절망이 묻어 있지만 나를 슬프게 하기는커녕 나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는다. 이 세상에 나만 불안하고 외로운 것은 아니며 이마저도 아름답게 승화시킨 시인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나의 영혼은 검은 / 페이지가 대부분이다.'라고 노래했던 한 시인의 구절을 읊으며 나는 아침에 길을 나선다.

 

7. 조니 워커 레드

 

 

비싼 위스키가 곧 좋은 위스키라는 생각은 우리나라에서 흔히들 갖게 되는 선입견일 것이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다는 사실을 이 위스키를 마시면 알 수 있다. 조니 워커의 라인들 중에서도 제일 저렴하고 세계에서 가장 대중적인 위스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3만 2천원 정도에 700ml짜리 병을 구매할 수 있다. 오래되고 비싼 위스키들에 비해 거칠고 깊은 맛에서 뒤쳐지긴 하지만 레드 특유의 향만은 진짜배기다. 이 술이 지닌 특유의 섬 지역 몰트의 향은 여타 고급 위스키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 내가 이를 즐겨 찾는 이유는 조니 워커 레드가 가격과 외관에 의해 평가받지 않고 고유의 개성으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이런 다측면적인 평가를 받는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8. LG Twins

 

 

LG Twins는 90년, 94년 두 차례에 걸쳐 우승했던 경험이 있는 팀이지만 내가 자란 00년대에는 한국 프로야구에서 손에 꼽히는 약체였다. 소위 엘지의 비밀번호 '6668587667'(03년부터 09년까지 엘지가 기록한 순위를 희화화 한 표현이다) 시절을 살았다. 칠흑같이 어두웠던 시기였지만 그 나름대로 그 시절만의 매력은 있었다. 구단의 모기업이 우리나라 최대 대기업 중 하나이고, 팬층이 두터운 인기 구단이 그렇게까지 야구를 못 한다는 게 매력이라고 한다면 매력이었다.

나는 그래서 엘지 트윈스가 좋았다. 배경이 좋다고 해서 다 잘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는 '너는 좀 더 노력하면 성적이 오를 텐데, 왜 더 노력하지 않니?' 혹은 '너는 좋은 배경을 활용하지 못하고 왜 열심히 하지 않니?'라는 소리를 귀에 달고 살았다. 나는 이런 나 자신을 엘지 트윈스에 투영하여 열심히 응원했다. 그리고 우리 팀이 더럽게 못해서 지더라도 묵묵히 박수를 쳤다. 내가 좋아하면 그만이지 뭐 꼭 한국 시리즈 우승할 필요가 있을까? 유니폼은 우리 팀이 제일 멋진데.

 

9. 스콰이어 빈티지 모디파이드 재즈마스터

 

 

본디 이 모델은 기타 브랜드로 가장 유명한 펜더 사에서 만드는 기타이다. 이 모델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 'Sonic Youth'의 리더 'Thurston Moore', 'My Bloody Valentine'의 기타리스트 'Kevin Shields'와 같은 뮤지션들이 즐겨 사용하던 기타였다. 오리지날 재즈마스터는 우리나라 돈으로 200만원 근처인데, 애석하게도 나는 이만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펜더 산하의 저가형 브랜드에서 제작한 30만원 짜리 카피 모델을 구매하여 사용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밴드를 해 왔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미 여러 대의 기타가 있었고, 또 가격이 워낙 저렴했던 탓에 처음엔 이 기타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타 밖에 연주하지 않는다. 가격을 떠나서 나에게 꼭 맞는 악기를 만났다는 느낌이다. 

 

10. 신세기 에반게리온

 

 

사실 10개 안에 이를 굳이 넣어야 하나 고민했다. 왜냐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본 애니메이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작품을 넣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인 게 나는 아직도 별 다른 할 일이 없으면 늘 이 애니메이션을 본다. 아마 전 시리즈를 최소 여섯 번 정도는 돌려 본 듯하다. 이 작품을 겉에서 언뜻 보면 SF 로봇 만화인 것 같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13살의 주인공 '이카리 신지'가 대인관계에서 느끼는 공포와 성장통을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SF적인 메타포를 통해 풀어낸다. 나는 아직도 내 자신이 이카리 신지 같이만 느껴진다. 나도 아직도 사람을 대하는 게 부담스럽고 어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진 출처=픽사베이, 펜더, 모나미, 문학과지성사, 조니 워커, LG TW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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