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고 드라마틱한 작품에 익숙해진 요즘, SBS 월화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하세요?'(극본 류보리 연출 조영민)은 자극적인 에피소드나 악인의 부재에도 몰입도를 높여간다. 불안과 우울, 답답함이 지배하는 코로나 시대를 잔잔한 전개와 서서히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으로 치유해준다.

프랑스 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의 인기 소설과 동명인 이 드라마는 제목에서 드러나듯 스승인 슈만의 부인이자 열네 살 연상의 피아니스트 클라라를 평생 사랑한 채 독신으로 살아간 브람스를 모티프로 했다. 극중 박준영(김민재)과 채송아(박은빈)의 대사에서도 나오듯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이야기일 수도, 세 예술가의 흔치 않은 우정담일 수도 있다.

드라마 ‘브람스를 좋아히세요?’는 스물아홉 살 클래식 연주자와 음악학도들이 그려가는 사랑과 우정의 이중주다. 20대는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도전하고, 원하는 분야에 입성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시기라면 30대는 그 분야에서 뿌리를 내리고 힘줄과 뼈대를 만들어가는 시기다. 그 경계와 변화의 길목에 선 스물아홉 청춘의 이야기는 20대에게도, 그 시절을 거쳐온 3040대에게도 공명을 일으킨다.

일찌감치 쇼팽 국제콩쿠르에서 ‘1위 없는 2위’를 수상하며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라선 박준영은 모든 것을 다 이룬 인물인 듯 보이지만 청소년 시절부터 가계를 책임지기 위해 콩쿠르에 연달아 출전했으며 현재까지도 아버지의 채무를 갚느라 허덕인다. 자신의 만족보다 청중과 자신을 후원해준 문화재단 이사장, 자기만을 바라보는 무능력한 부모를 위해 2~3일에 한번씩 무대에 오르고, 건반을 두드린다.

채송아는 일류대 경영학과 졸업을 앞두고 어린 시절부터의 꿈이었던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기 위해 학벌과 성과를 중시하는 엄마와 언니,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4수 끝에 음대에 입학했다. 정작 불행의 시작은 그때부터였다. 신은 그에게 연주자로서의 천부적 재능을 주진 않았다.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일찌감치 시작한 동기들에 비해 실력은 뒤처져 꼴지 언저리를 맴돈다. 음악은 위로가 아니라 짝사랑한 자신에게 끊임없는 상처만 남긴다. 기념 연주회 바이올린 파트에서도 밀려난 그는 문화재단 인턴으로 입사, 어느 여름날 박준영을 만나게 된다.

재단 인턴과 소속 간판 아티스트로 만나게 된 두 사람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바로 절친의 친구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끝을 아는 사랑에, 가슴을 후벼파는 외사랑에 뛰어들었음에도 이를 포기할 수 없었던 박준영과 채송아는 서로에게 자신을 투영시키며 스며들 듯 가까워졌다.

두 겹의 삼각관계를 내세운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는 진부함과 ‘막장’의 유혹을 거뜬히 건너뛴다. 섬세하게 감정선을 쌓아온 극본과 이를 몰입도 있게 담아낸 유려한 연출 덕분이다. 짝사랑의 대상인 악기공방 사장 윤동윤(이유진), 바이올리니스트 이정경(박지현)의 오랜 여사친 채송아-남사친 박준영에 대한 서사가 약해 설득력이 떨어지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삼각관계의 갈등을 초반부에만 비춰주고, 본격적인 이야기의 시작을 서로의 상처에 대한 위로와 관심, 설렘으로 관극의 흥미를 고조시킨다.

우유부단한 동윤, 이기적인 정경의 자기장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연을 찾아가는 남녀 주인공의 행보는 꽤나 직선적이고 속도감이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 사이에 “잔잔한 드라마인 줄 알았는데 긴장감 있고 재미있다” “잔잔마라맛 드라마다”라는 반응이 쏟아지는 중이다.

여기에 클래식 음악을 소재로 한 이 드라마는 이를 장식적으로만 사용하지 않고 스토리와 캐릭터에 이질감 없이 잘 녹여낸다. 클래식 음반사에서 마케팅 업무를 담당했던 신인 류보리 작가의 경험치 덕분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젊은 거장’이 생계형 피아니스트로 살아가는 모습, ‘신동’ 추앙을 받았으나 성인이 된 이후 특출날 것이 없어진 바이올리니스트, 자신의 작고 초라한 재능에 가슴앓이를 하거나 진로 고민에 빠진 클래식 음악학도들, 음악의 참 의미를 잃어버린 채 습관적으로 악기를 드는 연주자들, 대중의 관심권 밖에 있는 클래식 음악계 종사자들의 이야기가 현실적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슈만 ‘트로이메라이’,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월광’, 멘델스존 피아노 트리오 1번, 라벨 ‘치간느’ 등 클래식 명곡들은 상황과 인물의 심리에 접목돼 특별한 감성을 만들어낸다.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를 연주하는 배우들은 과하거나 어색함 없이 자연스럽게 연주 ‘연기’를 해낸다. 특히 디테일이라 놓칠 법한 피아노의 페달링과 현악기의 핑거링(운지)을 능숙하게 해내 놀라움을 안긴다.

김민재와 박은빈의 인상적인 연기와 호흡도 빼놓을 수 없다. 단정하지만 솔직하고 결단력 있는 피아니스트, 소심하고 기죽어 있는 듯 보이지만 속은 꽉 여문 현명한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밀레니얼 세대 예술가를 더할 나위 없이 표현해낸다. 

사진=SBS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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