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문소리가 '여배우는 오늘도'로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국내외 영화제를 휩쓴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 연출까지. 누군가는 오래된 꿈이라 짐작할지 모르나 문소리는 "자연스레 여기까지 흘러오게 됐다"고 했다.  

 

 

연극을 좋아해 꼬박 챙겨보다 무대에 서게 됐고, 이창동 감독에게 발탁돼 무명 없이 주연으로 올라섰다. 임신·육아를 거치며 배우로서의 자존감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연출 공부를 해보라는 임순례 감독의 권유로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때 만든 단편 세 편을 묶은 작품이 '여배우는 오늘도'다. 그 덕에 이 영화엔 학생 문소리의 흔적들이 보인다. 영화 제작사는 딸의 이름을 건 '연두미디어'고, 대학원 동기들과 품앗이해 작업했다.(참고로 극중 '개저씨'들을 리얼하게 연기한 배우들은 애니메이션 전공 학생들이라고 한다)

'연기력은 쩔지만 매력이 부족해 캐스팅 안 되는 배우 문소리'의 일상을 담아낸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유쾌하고 리얼하다. 극중 '문소리'는 무례한 농담을 던지는 사람들 앞에서 억지미소를 짓고, 남들은 화려하게 사는 줄 알지만 마이너스 대출을 갚느라 분주하다. "실화는 아닌, 그에 가까운 픽션이다"고는 하나 실제로 겪었을 법한 일들이 이어진다. 

"'당신들이 모르는 내 얘기를 들려주겠다' 그런 의도는 아니에요. 나 혼자만이 아니라 다들 이런 고민 하지? 그런 마음으로 말을 걸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문소리는 공감을 위해, 자신이 가장 잘 말할 수 있는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배우의 삶에서 일반 관객이 어떻게 공감대를 찾을 수 있을까 싶을텐데, 답은 제목 속 '여배우'에 있다. 남자 배우에겐 누구도 '남배우'라고 부르지 않으나 여자 배우에겐 너무도 자연스럽게 붙는 '여배우'란 호칭 말이다. 대한민국에서 여성, 여배우로서 사는 것에 대한 고충을 담았다. 

"직업란에 배우라고 쓰지, 여배우라고 안 쓰잖아요. 스스로는 배우라고 하지만 여배우라고 불리는 삶을 소재로 삼았어요. '여배우는 오늘도'에선 한국 속 여성으로서의 삶과 배우, 영화인으로서의 삶이 함께 흘러가요. 제목에 대해서도 당연히 따져봤죠. 내가 '여배우'란 표현을 써서 사회의 젠더감수성을 떨어뜨리는 것에 미칠 영향과, 이 영화를 내놓음으로써 갈 영향에 대해서요. 영화 제목은 그렇게 썼지만, 전체 이야기를 보신다면 의도를 아실거라 생각했어요."

 

 

그 말처럼 극중 '문소리'는 캐스팅이 되지 않아 발을 동동 구르고, 유치원에 가지 않겠다는 딸 연두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며, 병원에선 치매를 앓는 시어머니를 돌본다. 배우, 어머니, 아내, 딸, 며느리, 나 문소리로서의 면이 모두 모여, 뭐든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이길 권유받는 많은 여성 관객들이 공감할 듯싶다. 그러면서도 '여배우는 오늘도'는 고단한 삶이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문소리의 모습을 통해 따뜻한 위로도 전한다. 

'배우 문소리'에 대한 픽션이라지만 실제 문소리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이야기다. 쉽지 않았을 결정으로 보이는데, 그는 배우다운 답변을 내놨다.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의 문제는 작품에 맡긴지 오래됐어요. 어떤 영화를 만들 때 필요한 장면들이 있잖아요. 흡연, 음주, 차가운 바다에 뛰어든다든지…. 분명 영화를 통한 공감대가 더 클 텐데, 망설여지는 것보단 영화에 담은 내 진심이 어떻게 전달되느냐가 중요했어요. 어차피 저는 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직업을 갖고 있으니까요. 가랑비에 옷 젖듯 스멀스멀 작업하다보니 나중엔 뭐 그리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가 싶기도 했고요. 

다만 나에 대한 건 상관이 없는데, 제 주변 캐릭터들이 등장하다보니 실제 그들과는 다른데 오해받고 왜곡될까봐 걱정이 됐어요. 꾸며낸 이야기 안에서 진심을 전달하는 밸런스를 맞추기가 어려웠죠."

 

'여배우는 오늘도'가 인상적인 또 하나의 이유는 자의식의 늪에 빠진 초보감독들이 저지르는 실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이야기를 담아냈음에도 메시지가 확실하고 유쾌하다. 문소리는 이 칭찬에 "근데 감독 눈엔 다 보인다"며 웃었다.

"'이 영화를 왜 만드는 걸까'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며 찍었어요. 남편(장준환 감독)과 대사, 장면, 편집 같은 부분에 대해선 의논한 적이 없는데 '이런 영화가 세상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있느냐'에 대해선 얘기를 했고요. 그런 과정이 즐겁지만은 않더라고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도 있고 어려운데, 그래도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 자체가 주는 만족감이 있었어요."

문소리는 감독으로선 어떤 모습이었을까. 출연, 감독을 함께 하느라 이를 생각할 겨를도 없었단다. 일례로, 다함께 언덕을 오르는 3막 엔딩신은 해가 뜨기 전 마쳐야 해, 컷 소리가 나는 동시에 하이힐을 벗고 달려가 장면을 체크했다. 

그런 숨가쁜 작업에서도 출연 배우들은 하나같이 빼어난 연기력을 자랑하는데, 문소리는 캐스팅 기준은 따로 없지만 "정이 가는 배우를 썼다"고 했다. 고된 작업에 서로 힘이 될 수 있는, 또 극중 밉게 보일 수 있지만 표현방식만 서툴 뿐 좋은 의도를 가진 인물로 보였으면 했다는 것이다.

'여배우는 오늘도' 포스터에서 문소리가 트로피를 쥐고 질주하는 운동장 트랙은 실제로 문소리가 자주 찾는 곳이다. 400여m 트랙을 걷고 뛰며 체력을 관리한다. 영화인 문소리의 여정이 그런 것 같다. 걷든, 뛰든 자신만의 행보로 꾸준히 나아가고 있다.   

"앞이 안 보이죠. 안정도 안 되고, 길을 찾으면서 내가 괜한 데 힘쓰는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런데 따라갈 수 있는 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가도, 막상 따라가고 싶지도 않아서 결국은 내 책임인 거예요. 저라는 사람이 안정된 삶을 추구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팔자인가보다 생각합니다.(웃음)"

 

 

사진=연두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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