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연기파 배우들의 드림 캐스팅을 자랑하는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제목부터 아이러니한 영화다. 고전소설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처럼 반어적인 제목의 영화는 시종일관 유쾌하고 섬세하게, 또는 날카롭게 전쟁의 단면을 반관료주의적 시선으로 그려낸다.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1995년 발칸반도, 예측불허의 휴전 상황 속 마을에 생명수를 공급하기 위한 국제구호요원들의 고군분투를 담았다. 주어진 시간은 단, 24시간. 국제구호요원들의 예측불허 미션 수행 프로젝트는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먼저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최악의 하루를 여는 강렬한 오프닝 시퀀스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한 마을의 유일한 식수 공급원인 우물에 부패한 시체가 둥둥 떠있다. NGO 구호단체요원 맘브루(베니치오 델토로)가 시체를 끌어올리려 하지만 견고하지 못한 밧줄로는 도무지 역부족이다. 결국 밧줄은 끊어지고, 맘브루는 UN에 지원을 요청하지만 거절 당한다. 

콧대 높은 UN은 지원을 거절한 이유에 대해 묻자 자신들이 정해놓은 수칙을 운운할 뿐이다. 당장 다른 마을만 봐도 사람들은 식수를 얻기 위해 비싼 값을 지불하고 있는 상황. 한시라도 빨리 시체를 해결해 생명수를 공급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맘브로를 중심으로 국제구호요원들이 한 팀으로 뭉친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등의 작품을 통해 할리우드의 명품 조연으로 자리매김한 베네치오 델 토로는 팀의 리더 격인 맘브루 역으로 역시나 믿고 보는 호연을 펼친다. 언제나 카리스마 넘치는 역할을 도맡아온 그는 이번 영화에선 지극히 인간다운 면모를 부각시킨다. 불량배들에게 공을 빼앗긴 소년을 도와주는 정의감은 물론, 한때 자신이 바람을 폈던 상대에게 뻔뻔하게 일관하면서도 이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양면성을 담백하게 연기해낸다. 

맘브루의 든든한 조력자 B 역의 팀 로빈스는 러닝타임 내내 델 토로 못지 않은 존재감을 드러낸다. 전반적으로 유머와 풍자를 담당하는 그는 어떤 긴장감 넘치는 극한의 상황에서도 허를 찌르는 농담으로 웃음을 자극한다.

영화는 원칙이 우선인 UN과 생명이 우선인 요원들 사이의 갈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사유를 끄집어낸다. 국경 없는 의사회 출신의 작가 파울라 파리아스 소설 '비가 내릴듯한'을 바탕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출신의 페르난도 레온 데 아라노아 감독이 직접 각본을 썼다. 스페인의 아카데미라 불리는 고야상을 총 12번 수상한 감독은 자신의 강점인 유머와 풍자를 이번 작품에서도 착실히 녹여냈다.

 

 

유머가 난무해 한없이 가볍기만 한 영화는 결코 아니다. 감독은 탁월한 연출력으로 휴전 후 황폐화 된 현실의 무게감 역시 놓치지 않는다. 우연히 거리에서 만나 팀원으로 합류하게 된 소년 니콜라(엘다 레지도빅)의 이야기를 통해서다. 전쟁통에 부모와 갈라져 할아버지와 살게 된 니콜라의 사연이 마지막쯤 밝혀질 때엔 요원들이 하루를 공쳐버리는 동안 관객들이 잊고있던 안타까운 전쟁의 참상을 상기시켜준다. 잔인하고 노골적인 장면 하나 없이도 강렬한 메시지와 큰 울림을 전하는 감독의 기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그러면서도 영화는 끝까지 유머러스함을 놓치지 않는다. 'Welcome to the hell'이라 적힌 벽낙서 그 옆엔 벽에 기대선 마을 주민들이 담배를 피며 미소 짓고 있다. 비까지 내리는 불쾌한 하루가 어떤 결말을 낳을진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러닝타임 106분, 15세 이상 관람가, 9월 21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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