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에 어울리는 제목이 절로 낭만모드를 가동시키는 '시인의 사랑'이 언론시사를 통해 속살을 드러냈다. 영화는 앞서 제18회 전주국제영화제 극영화피칭부문 최우수상과 관객상을 수상했으며 오는 7일 개막하는 제42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디스커버리 섹션에 초청 받았다.

 

01. 시집 같은 시나리오

주인공은 팍팍한 현실에서도 진짜 시를 쓰는 일이 뭘까를 고민한다. 그의 곁에는 무능한 남편을 대놓고 구박하면서도 세상에서 그를 제일 아끼고 사랑하는 아내가 있다. 어느 날, 맞은편 가게의 아르바이트생으로 나타난 소년이 시인의 시야에 들어온다.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소년은 틀을 깨지 못한 채 아름다운 시구에 함몰돼 있던 시인을 자극하며 영감을 준다. 삶의 어두운 이면에 눈을 돌리게 된 시인은 좋은 시를 탄생시키지만 현실은 아수라장이 된다.

 

 

평온해 보였던 일상에서 튀어나오는 불가해한 감정의 실체, 관계가 지닌 다양한 얼굴을 파고드는 시나리오는 한 편의 시집을 읽듯 유려한 내레이션과 함축적인 대사로 가슴에 꽂힌다. 시나리오를 집필한 김양희 감독은 6년 전 제주로 이주한 정착민이다. 또한 '시인의 사랑'은 제주 출신 시인이자 제1회 4·3문학상 수상자인 현택훈 작가의 이야기를 모티프 삼았다.

 

02. 낭만과 충격의 조수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힐링의 섬 제주가 배경이다. 주인공은 마흔의 시인이다. 낭만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하지만 ‘시인의 사랑’은 뻔한 예상을 반전시킨다. 인생의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사랑을 맞닥뜨린 시인, 그의 아내 그리고 한 소년은 사랑, 의심, 질투란 감정의 소용돌이로 휩쓸려 들어간다. 감성드라마인 듯싶다가 막장드라마에 익숙한 서사와 장면이 툭 튀어나오는가 하면 시와 삶을 은유하는 통찰이 밀물과 썰물처럼 교차한다. 감추고 싶은 내면의 옷을 하나씩 발가벗기는 김양희 감독의 집요하고 저돌적인 시선이 충격적이다.

 

03. 양익준X전혜진X정가람 앙상블

 

 

배우 겸 감독 양익준은 아웃사이더, 찌질한 캐릭터 연기의 마스터가 된 느낌이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무명시인 현택기는 그리 뛰어난 재능도, 돈도 심지어 정자마저도 없다. 그저 사람 좋고 수줍음 많은 ‘무쓸모’ 남자가 변해가는 과정을 정중동 연기로 표현한다. ‘더 테러 라이브’ ‘인간중독’ ‘사도’ ‘불한당’ ‘택시운전사’에 이르기까지 인상적 조연을 전담해온 전혜진은 주연작 ‘시인의 사랑’에선 시인의 아내이자 가장 현실적인 인물을 맡아 생활의 냄새를 캐릭터 전체에 아로새긴다. 독립영화 ‘4등’으로 주목받은 신인 정가람은 화약고와 같은 위태로운 청년을 패기만만하게 소화한다. 세 배우가 주고받는 호흡의 밀도와 앙상블은 이 영화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04. 절망과 희망의 브로맨스

최근 한국영화의 단골 아이템 중 하나인 남남케미, 브로맨스가 이 영화에서도 관통된다. 사랑과 우정 사이를 위태롭게 혹은 모호하게 오가는 관계는 앞서 설경구 임시완 주연 범죄액션영화 ‘불한당’에서도 다뤄진 바 있다. 마흔의 시인과 10대 청소년의 특별한 관계맺기는 ‘시인의 사랑’이 지닌 특장점이 될 수도, 위크 포인트로 작용할 수도 있을 듯하다. 평화로운 섬 제주를 덮친 엄청난 감정의 너울에서 두 남자가 선택한 좌표를 관객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한 대목이다. 러닝타임 1시간49분. 15세 이상 관람가. 9월14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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