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생태공원

난 왜 자신이 비참해지는 곳을 스스로 찾아간 것일까? 수많은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다니며 즐겁게 웃고 떠들고, 수많은 커플이 차가운 바닷바람을 막으려 서로 끌어안은채 걷는 핫플레이스에서, 난 왜 외투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후드를 뒤집어쓴 채 말 없이 홀로 다녀야 하는 것일까? 이래서 다시는 혼자서 여행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었는데.

그러면서도 꿋꿋이 걷는다. 그대로 돌아가기엔 40분이 걸려서 버스를 타고 왔던 것이 아깝다. 입장료 8000원이 아깝다. 본전을 뽑으리라. 갈대와 억새로 우거진 이 습지 위 산책로의 끝을 보고야 말겠다. 산책로의 끝엔 전망대가 있다. 조금 높은 언덕 위를 올라가야 해서인지 산책로만큼 사람들이 많지는 않다. 커플은 덜 보이고 나처럼 혼자서 걷는 사람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덜 외롭고 덜 쓸쓸하다. 더구나 전망대 꼭대기에 올라 내려다본 순천만의 전경은 조금 전의 울적한 기분을 싹 날려준다.

내려오는 길은 전망대에서 우연히 만난 말동무와 함께다. 누군가와 함께 있으니 혼자 있을 때보다 훨씬 좋다. 여행 이야기나 일상 이야기 등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다보니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벌써 생태공원 밖에 나와있다. 이런 특별한 장소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걷는다는 것, 정말 기분 좋은 일이다. 여행을 혼자 하는 건 역시 이제 그만 해야겠다.

선암사

정호승 시인의 <선암사>라는 시가 있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고등학교 때 이 시를 읽고는 ‘언젠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불현듯 이 시가 머릿속에 다시 떠오르며 드디어 그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불면증 때문인지 눈에서 눈물이 나오기도 했으니까.

시는 ‘해우소 앞 등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라는 구절로 끝난다. 선암사 해우소 앞에서 통곡을 해야겠다. 그런데 참 웃기다. 통곡하기 위해 전라남도 순천까지 오다니. 집 주변 가까운 곳에도 마음 놓고 울 수 있는 장소가 있으면 좋겠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괴로움을 쏟아낼 수 있는 나만의 안식처. 심지어 집에서조차 대성통곡하기가 쉽지 않다. 가족들에게도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에.

아침 여덟 시, 버스에서 내려 선암사로 들어가는 작은 산자락 길을 걷는다. 조용하게 천천히 홀로 걷는다. 방문자는 내가 유일한 듯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극대화되었던 선운사의 조용함과는 다르다.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는 나만의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자연이 나를 감싸 안는 듯한 작은 길 위에서 마음이 편안해진다.

이 길에서 가장 좋은 건 작은 계곡, 즉 물이 있다는 것이다. 어느 작은 미술 전시회에 갔던 일이 생각난다. 물을 주제로 했던 전시였는데 작가의 생각을 직접 들을 수 있었다. 그분에게 집에서 가장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은 욕실이라고 했다. 왜 그런가 생각했더니 집에서 거의 유일하게 물이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물은 생명이 태동하는 원천이며 포용하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 분에게 들었던 말에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계곡 중간엔 눈에 띄는 돌다리가 있다. 선암사의 하이라이트를 뽑으라면 이 곳을 뽑겠다. 화려하거나 웅장한 멋을 가진 다리는 아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이 계곡의 한 일부분인 듯 그 곳에 정말 자연스럽게 어울린다. 그러면서도 발길을 멈추고 앞뒤로 위아래로 둘러보게 하는 멋이 있다.

다른 계절의 선암사는 어떤 모습일까? 금강산처럼 사계절마다 각각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다른 계절에 다시 와보고 싶다. 물론 그 때는 눈물이 나서 오는 일은 아니면 좋겠다.

선암사 자체는 생각보다 크지 않고 아기자기한 느낌이다. 천천히 둘러보아도 다 돌아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해우소도 금방 찾을 수 있다. 해우소가 아닌 ‘뒤깐’이라고 써있다. 그러나 해우소 앞에 등이 굽은 소나무는 찾을 수 없었다. 뭐 이젠 굳이 찾지 않아도 괜찮다. 통곡하지 않을 거다. 선암사로 들어오는 길에 이미 마음이 편안해졌으니까.

열차에서

무궁화호 열차가 출발한다. 영등포까지는 앞으로 다섯 시간이 걸린다. 스쳐 지나가는 창 밖 풍경을 바라본다. 눈을 깜빡깜빡. 그러다가 꿈뻑꿈뻑. 다시 꿈- 뻑. 눈을 떠보니 열차는 안양을 지나고 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기지개를 켠다. 잘 잤다. 개운하다. 그러고 보니 이번 여행에서 잠을 못 자서 뒤척인 적이 있었나? 이동하던 버스에서도 틈틈이 잠에 빠졌고 숙소에서도 편하게 숙면을 취했다. 다시 피부도 탄력을 찾고 실핏줄이 터져 빨갛던 눈도 멀쩡하게 돌아왔다. 물론 오늘 밤도 잠이 잘 올 것 같다. 열차가 영등포에 도착했다는 방송이 나왔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열차에서 내린다.

 

 

출처 = http://magazinewoom.com/?p=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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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 신형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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