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시기, 찰나의 순간이기도 하다. 영화 ‘환절기’는 한 번도 짐작하지 못했던 계절을 만난 중년여성의 이야기이자, 마음의 계절이 바뀌는 순간을 경험한 인물들의 고즈넉한 심리극이다.

수현(배종옥)은 이런저런 이유를 앞세워 필리핀 근무를 고집하며 귀국하지 않는 남편(박원상)과 떨어져 고3 아들 수현(지윤호)과 단둘이 산다. 어느 날, 수현은 어려운 형편의 친구 용준(이원근)을 집으로 데려와 함께 지내기 시작한다. 몇 년 후 군에서 제대한 대학생 수현은 용준과 함께 떠난 여행길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진다. 식물인간이 된 수현의 병상을 지키는 미경은 혼자 멀쩡하게 살아남은 용준이 원망스럽기만 하다. 우연히 수현의 소지품을 정리하던 중 수현과 용준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 미경은 수현을 데리고 요양병원으로 자취를 감춘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 초청작인 ‘환절기’는 기존 퀴어영화의 틀을 조심스레 해체한다. 동성애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성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거나 상황과 감정의 파고를 높이던 양식과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은 엄마이자 중년여성이다. 그녀를 축으로 아들, 아들의 친구, 남편 등 저마다 아픔과 회환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의 심리를 섬세하게 훑어간다.

시나리오는 함축된 의미와 문학적 대사로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 굴곡이 관객의 마음에 다다르도록 한다. 소리 내어 말하는 대신 작은 몸짓, 미묘한 표정으로 집중도를 높이고 자극적인 장면 없이도 시선을 붙드는 연출력이 신선하다. 느린 템포를 유지하면서 리듬감을 잃지 않는 미장센도 눈을 즐겁게 한다.

남편의 불륜, 지방 도시에서의 적막한 삶, 품 밖으로 나가버리는 아들로 인해 허망하기만 한 미경 그리고 불우한 가정환경과 연인의 부재에 내몰리며 “갈 데가 없어져버린” 용준은 다른 듯 같은 모습이다. 둘 사이에 이뤄지는 원망, 미안함, 용서와 화해의 감정의 소용돌이는 어떤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 서로를 밀어내고 받아들이는 가을과 겨울처럼.

 

 

극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는 배종옥은 과거 그녀에게 전성기를 안겨줬던 드라마 ‘거짓말’을 연상케 하는 폭넓으면서도 정확한 감정을 빚어낸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어머니의 원숙함이 보태졌다. 마스크에서부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원근은 어둡고 복잡한 용준 캐릭터를 전형성으로 소비하는 법 없이 가슴 아프게 살려낸다. 지윤호는 해맑고 다정한, 여름처럼 눈부신 청춘상을 연기하며 두 배우와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응달진 비탈에 쌓였던 눈이 봄날 햇볕에 녹아내리듯, 입춘이 지난 이 시기와 포개진 ‘환절기’는 관계를 고민하는 이들에겐 적잖은 무게의 영감을 안겨줄 만한 작품이다. 러닝타임 1시간41분. 15세 이상 관람가. 2월22일 개봉.

 

저작권자 © 싱글리스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