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로맨스영화 빠돌이(?)입니다. 어릴 적부터 흔히 ‘남자의 장르’로 여겨지는 액션, 누아르, 스릴러보다도 두 사람이 만나서 서로 애틋한 눈빛을 보내고 가슴 아파하며 결국 키스로 마무리 되는 그 아름다운 스토리에 더 끌렸지요. ‘러브레터’ ‘이터널 선샤인’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은 아직도 제 가슴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습니다.

 

그리고 최근 극장가에 또 한 번 제 가슴을 울리는 로맨스영화가 등장했습니다. 바로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이하 ‘셰이프 오브 워터’‧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이 그 주인공입니다. 이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은 사람은 비단 저 뿐만은 아니겠지요. 그래서 오늘은 ‘로맨스 빠돌이’의 관점에서 이 영화를 한 번 바라보려 합니다.

영화는 미국 항공우주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여인 엘라이자(샐리 호킨스)의 사연을 조명합니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정해진 시간에 출근하고, 또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똑같은 일상을 살아가던 그녀는 언뜻 스크린 감옥에 갇힌 삶을 보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 엘라이자는 어느 날, 딱딱한 수조에 갇힌 채로 실험실에 끌려온 괴생명체(더그 존스)를 만나게 되고, 그와 무언의 소통하며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게 되지요. 그 둘의 만남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자유’와 ‘사랑’을 향해 나아갑니다.

기본적으로 ‘셰이프 오브 워터’는 동화적 판타지를 밑바탕에 깔아둔 채 진행됩니다. 오프닝 신에서부터 그 톤이 명확히 드러나는데요. 마치 수조 속에 떠있는 듯한 엘라이자의 모습이 등장하면서 “그에 대한 이야길 한다면, 무엇을 말해야 할까?”라는 내레이션은 마치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동화의 첫 머리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 로맨스영화에서 이런 동화적 상상은 독이 되기 십상입니다. 관객들이 둘의 사랑에 집중하기 위해선 나름의 당위가 필요한데, 동화 같은 이야기는 어떻게든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한정된 결말로 가려는 습성이 있기에, 사랑에 빠지는 이유를 묘사하기 쉽지 않은 까닭이지요. 그러나 ‘셰이프 오브 워터’는 이 동화적 결론을 향해 가면서도 함정에 빠지지 않습니다.

 

엘라이자는 너무도 외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할 수 없는 장애를 가졌기에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지 못했고, 그녀의 집은 누구도 들어오지 않아 한기마저 감돌지요.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욕조 속에서 홀로 위로하는 일 뿐이었습니다. 마치 ‘난 사랑 할 수 있는 몸이야’라고 확인이라도 받으려는 것처럼요.

그런 그녀 앞에 더더욱 외로운 남자가 등장합니다. 그 남자는 알지 못하는 인간세상에 홀로 떨어져 소통은커녕 온갖 실험과 고문에 시달립니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시선은 실험자와 피실험자의 입장이지요. 그렇기에 일라이저에게 그 남자는 특별합니다. 평생에 처음 마주한, 위로를 줄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지요. 매일을 혼자 위로하던 그녀는 그 남자로 인해 자신의 유일한 쓸모를 찾습니다. 동화 속에서 수동적인 여주인공의 모습과 상반되는 모습입니다.

‘셰이프 오브 워터’가 특별한 이유는 바로 이 지점입니다. 외로움에 휩싸여 있던 여인이 어떻게 이를 극복하고 능동적으로 헤쳐 나가는지에 방점이 찍힙니다. 로맨스 서사에 한 여인의 성장 서사를 덮어놓은 모양입니다. 백설공주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왕자의 키스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인어공주처럼 왕자가 자신을 알아봐주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엘라이자(공주) 스스로 괴생명체(왕자)를 구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여기서 엘라이자의 움직임은 시종일관 느릿느릿합니다. 일분일초를 바삐 움직이는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섀넌), 소련 스파이 호프스테틀러 박사(마이클 스털버그) 등 항공우주연구센터의 모든 이들과 달리, 엘라이자는 마치 굼벵이처럼 혼자서만 다른 시간을 살고 있는 듯 하지요. 느릿한 걸음은 '혹여 탈출에 실패하지는 않을까' 관객들의 심장을 옥죄지만, 엘라이자는 느리지만 똑바른 방향으로 자신의 길을 나아갑니다. 저는 이 모습이 참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사랑은 그렇게 천천히,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결국 이 영화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동화적인 한 문장으로 완성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엘라이자의 느릿한 시선으로 결론이 아니라 한 걸음 한 걸음의 과정을 더 심도 깊게 조명합니다. 엘라이자와 괴생명체가 물 속에서 함께 섹스를 나누는 신, 함께 과묵한 식사를 나누는 신 등은 사랑에 대해 결론이 아니라 '함께 하려는 의지'의 중요성을 더 크게 강조합니다. 괴생명체가 수화로 하는 "You. And. Me. Together"라는 말은 어쨌든 사랑도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요.

영화가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면서 저는 ‘물의 형태’라는 뜻의 제목에 대해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사실 이 제목은 일면 형용모순처럼 보입니다. 담는 그릇에 따라 자유롭게 형태가 바뀌는 물에게서 형태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어색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사랑의 모양’이라는 부제를 함께 생각해 봤을 때, 저는 형용모순인 이 제목에 대해 혼자 욕조에서 자위하던 엘라이자의 사랑(물)이 괴생명체의 빈 마음그릇에 담겼을 때야 비로소 의미가 생긴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결국 둘은 너른 물(사랑) 속에서 자유롭게 호흡할 수 있게 됐으니까 말이지요.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 함께 호흡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도 '함께 하려는 의지'를 이어간다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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